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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에 계시는 분에게 봉명학교에 대해 물어보니, 이 입구 부근이 봉명학교 터라고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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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학교 학생들은 만해 선사의 강연 등으로 민족정기를 가다듬었고, 오늘날의 유아, 초등, 중등학제를 통해 영어, 지리, 역사, 수학 등 신학문을 배웠다. 봉명학교는 연극, 가장행렬, 민속놀이, 축구 등 다채로운 교육 과정을 통해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노력은 실질적인 독립항쟁으로 이어졌다. 봉명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축구단은 1933년 4월 관동축구대회에서 우승한다. 관동축구대회는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축구를 매개로 지역 공동체와 백성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대회로, 1942년 일제가 강제로 폐지했다. 봉명학교 교사와 학생들, 스님들은 1934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행사로 연극과 가장 행렬을 준비했다. 연극 제목은 ‘국경의 밤’이었고, 당시 봉명학교 교무를 맡았던 박종운 스님의 기지로 일제의 사전 검열을 피하고 공연됐다. 가장 행렬은 기습적인 만세 항쟁으로 이어졌다. 봉명학교는 1936년 조선어 수업을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았다. “조선어 시간에 토론이 있었는데, 결론은 돈으로 살지 말고 나라와 민족에 공헌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어 시간이 끝나자 교무주임과 형사가 교실로 들어와 조선어 책을 다 거둬갔다. 이것이 마지막 조선어 시간이었다. 그 후로 학교가 폐교되었기 때문이다...건봉사와 봉명학교를 강제로 떠나게 된 금암은 이후 고향 간성과 고성, 양양, 인제 지역을 돌며 설날에 모여 조상에게 떡국 한 그릇 올리자는 취지로 사람들을 만나 ‘기묘갑계(己卯甲契)’를 조직하고, 삼년 만에 수천 명을 모았다.” 《뚜껑 없는 조선역사책》 금암 의훈은 건봉사 살림을 맡아 하며 봉명학교를 설립해 민족의 미래와 한국 불교를 밝혀줄 인재를 길러냈다. 만해와 금암은 건봉사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항일 독립 투쟁을 펼쳤다. 건봉사와 봉명학교에서 자란 인재들은 훗날 독립과 민족의 근대화,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건봉사와 봉명학교에서 배출된 수많은 민족 동량들은 우리 독립항쟁사와 근현대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에서 건봉사는 외롭게 빠져 있다. 금암 의훈이 보여 준 기개와 독립 항쟁의 역사만 해도 사손(師孫) 설산스님의 증언과 회고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묻혀 있으리라. 일제 강점기 금강산 건봉사는 만해 선사의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에 기반을 둔 독립 항쟁의 산실(産室)이었다. 출처 : BBS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