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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사명대사기적비 사명당(泗溟堂) 유정대사(惟政大師) 비문(碑文)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사명대사(泗溟大師) 기적비명(紀蹟碑銘) (篆題) ​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의병대장(義兵大將)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대사(泗溟大師) 기적비명(紀蹟碑銘) 서문을 병기함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 원임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지제교(知製敎) 남공철(南公轍)이 찬술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都護府使) 겸(兼) 원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토포사(討捕使) 허질(許晊)이 글씨를 쓰고 전액을 아울러 썼다. 금강산(金剛山)은 비로봉(毗盧峯)으로부터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된다. 단발령(斷髮嶺) 이서(以西)지역은 내점(內岾)이라 하고 안문(鴈門) 이동(以東)은 외점(外岾)이라 한다. 내점의 표훈사(表訓寺)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가르침을 베푸시던 곳이고 외점의 건봉사(乾鳳寺)는 사명대사(泗溟大師)께서 의병을 모으시던 곳이다. 두 분은 비록 부도(浮屠)에서 나왔지만 서산은 그 절개로써, 사명은 그 공으로 유명하였다. 땅은 사람 때문에 귀중해 지니 절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나라에서 제일이 되었다. 도지(圖誌)를 살펴 보건대 당(唐) 건원(乾元) 년간에 산인(山人) 정신(貞信)이 도량(道場)을 열어 그곳에 미타(彌陀)와 관음(觀音) 두 보살상(菩薩像)을 받들었으니 이 도량을 건봉사(乾鳳寺)라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부터 스님의 화상(畵像)과 원불은탑(願佛銀塔), 향로(香鑪), 철장(鐵杖), 취혜(橇鞋), 산호(珊瑚), 염주(念珠)가 각각 하나씩, 금가사(金袈裟) 1습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여래(如來)의 어금니가 보관되어 있어 일이 더욱 신기하니 그 설치가 이적을 서술하는 것에 가깝고 이른바 석탑(石塔)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였다. 산중(山中)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밤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무지개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본래의 성은 임씨(任氏)이며 본관은 밀주(密州)였다.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다. 조금 자라서 은사(恩師)인 중덕(中德)을 좇아 절의 악서암(樂西菴)에서 삭발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를 사사하여 연화경(蓮華經) 6만 9천여 마디를 배웠다. 만력(萬曆) 20년에 왜구(倭寇)가 조선(朝鮮)을 노략질하니 휴정(休靜)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으로 만들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倭兵)을 대파하였고 목을 벤 것이 2천급이었다. 소경왕(昭敬王)이 행재소(行在所)로 불러서 만나보았고 친히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사사하고는, 명하여 팔도도총섭의병장(八道都摠攝義兵將)으로 삼았다. 임금의 수레가 환도(還都)하는 데에 미쳐서 정사를 잡은 대신들 중에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정(休靜)은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늙어서 장차 죽을 것이니 병사(兵事)를 제자 유정(惟政)에게 맡기고 해골을 받아 돌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소경(昭敬)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그의 뜻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마(馹馬)를 타고 경사(京師)에 이르도록 명하고 드디어 그 대중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이르기를, 만이(蠻夷)는 본래 불도(佛道)를 좋아하니 유정(惟政)을 보내어 강화를 성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1품의 관계를 하사하고 사신의 예식으로 그를 보냈다. 스님이 일본(日本)에 이르자 마침내 삼도(三塗)와 오계(五戒)로서 오랑캐 왕 및 평수길(平秀吉)에게 설명하니 그 말이 모두 청정(淸淨)과 죽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았다. 그래서 강화가 성립되어 장차 돌아가려고 하니 잡힌 남녀 3천명을 풀어주었다. 이전에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얻은 여래아(如來牙) 10매가 뒤에 왜적에게 약탈되었던 것을 대사는 마침내 간절한 말로 요구하여 돌려받아서 절에 보관하였으니 곧 석탑(石塔)이 이것이다. 유교와 불교는 가르침을 달리하므로 사대부들이 일찍이 불교를 기롱하고 배척하여 함께 하고자 아니하여 말하기를, “자비(慈悲)와 인의(仁義)는 종지가 다르고 견성(見性)은 격물치지(格物致知)만 못하며 고요함을 익히는 것은 정성과 경건을 멀리함이 있다. 터럭 끝만큼의 차이는 성인의 도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서산(西山)과 스님이 수립한 것을 보면 군신 부자의 의에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저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성리(性理)를 세세히 탐구하고 인의(仁義)를 높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질이 없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라는 이름이 있으면서도 유가로서 행하는 것은 내 도(吾道)이지만 유가의 이름이 있으면서 불가로서 행하는 것이 이단(異端)일 뿐이니 그것을 물으면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을 고치면 옳으니 내가 마땅히 그것에 나아갈 것입니다. 조정이 일본과 강화를 맺을 때에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나아가서 죽을 만한 곳이 없으니 돌아가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자는 것은 옳다. 서산이 떠났던 데에는 그가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스님 같은 분은 서산과 함께 떠나지 않고 더욱이 힘써 그 의논을 찬성하였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서산은 경에 가까웠으므로 그 절개는 높았으며, 사명은 권도(權道)에 가까웠으므로 그 공은 넓었다. 그러나 화의를 성립시키는 것은 당시의 선비들이 그 일을 주장하는 것이 많으니 비록 스님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일본은 불교를 높이고 믿으므로 요순(堯舜)과 공자(孔子)의 도로 교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일은 진실로 그 대세를 타서 인도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또 스님의 충성과 믿음은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구구하게 유세하는 선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국가가 그 이익을 누리는 것이 지금까지 3백년이니 그렇다면 서산대사가 물러나 도를 지켰던 일과 사명대사가 뜻을 굽혀 대중을 구제하였던 일이 각자의 의(義)가 있는 것이지만 그 충성이 나라를 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같은 때에 서산대사를 따르는 사람에는 또 해안(海眼)과 영규(靈圭)가 있었다. 해안은 영남에서 기의(起義)하였고 영규는 일찍이 조문열공(趙文烈公) 헌(憲)과 금산 싸움에서 좇아 죽은 분이다. 밀주(密州)에는 옛날부터 스님의 영을 모신 사우가 있는 데 목릉(穆陵) 때에 표충(表忠)이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우리 성상이 즉위하신 이래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일에 더욱 감동하여 일찍이 영변(寧邊)의 옛 사우에 나아가 그것을 표창하였다. 본조(本朝)는 유술(儒術)을 존숭하여 일찍이 승려를 널리 제도시키고 사찰을 높인 적이 없었지만 두 성상이 여기에 마음을 쓰신 것은 다만 충의를 장려하고자 한 때문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았겠는가. 내 생각에는 관동에 본사에 남긴 유적을 예부(禮部)로 논이(論移)하고 또 장차 조정에 시행하기를 청하여 기적비는 두어야 할 것이다. 와서 속하는 자들이 드디어 돈 100꾸러미를 덜어서 베풀고 모연문(募緣文) 다섯 두루미를 지어서 그 역사를 도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서역 천축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 왔네. 한나라와 양나라를 거쳐 당과 송, 원나라까지 유가가 이단이라 헐뜯으며 더불어 동문으로 여기지 않으니 누가 대사를 알까? 스스로 선을 하여 깨달았으니 의를 수레로 하고 믿음을 길로 삼아서 여러 사람들 중에서 우뚝 빼어나서 수립한 바를 더욱 보았다네. 엄연한 스님의 상이 있으니 금강산의 사찰이라네. 곁에 석탑이 있으니 여래의 뼈를 모신 곳이라네. 유리의 목구멍 산호의 혀 천개의 바퀴 묘상이 전하여져 오는 듯 하네. 만력 년간에 섬 오랑캐가 명을 거슬려서 서산대사는 공을 아뢰며 제자는 유정이라네. 왕이 말씀하시길, 저 왜구가/ 나의 원수로다. 전쟁이 8년이니 백성이 쉬지 못하도다. 모든 그 정신들 중에 그 누가 나의 근심을 풀어줄까? 공경이 끙 한탄을 하네. 이 오랑캐는 교활하여 치우친 곳으로 도망가 있네. 풍속은 본디 불교를 숭상하니 차라리 형세로 인도할 일이지. 이치로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네. 이에 대사를 일으켜 일본으로 보냈다네. 푸르고 아득한 만리 길 하늘과 땅이 아득히 장구 하구나. 삼월에 바람을 기다렸다가 사월에 돛을 폈다네. 마침내 왜왕을 만나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평화롭게 담소하며 강화가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이 팔로를 좇아 왜적의 분위기를 깨끗이 하니 사녀(士女)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니 우리와 태평을 나누는 구나. 서산대사의 높은 절개 사명대사의 위대한 업적이여 떠나는 것도 혹 떠나지 않는 것도 그 의는 동일한 것이라네. 산하를 돌아다니며 푸른 빛 말과 불 뿜는 용 동로(銅鑪)와 철장(鐵杖) 목혜(木鞋)와 주낭(珠囊) 천년동안의 마사(摩挲)에서 부처님의 향기 맡는 듯 하네 서산은 구름과 같고 사명은 물과 같으니 물이 흐르면 자취가 남지만 구름이 떠나면 머문 곳이 없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신년(정조 24, 1800년) 4월 일에 비를 세웠다. 자료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