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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성은 최요 휘는 수성이고 자는 가진이며 호는 원정 또는 북해거사 경호산인 이다. 강릉최씨 시조인 고려 삼중대광 삼한벽공 개국찬화공신 영첨의 정승 충무공 경흥 부원군 휘 필달의 19대손으로 고조는 증 병조참판 휘 안린 증조는 이조참판 휘 치운 조는 대사헌 휘 응현 선고는 생원 휘 세효이고 선비는 동주최씨이며 서기 1487년에 강릉 북평에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뛰어나고 예절이 남다른데가 있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되 거상 범절이 성인과 같았고 아버지의 상중에는 3년 廬墓(여묘)살이를 하였다. 거유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도학자 정암 조광조 충암 김쟁과 도의의 교를 맺아 대유의 일컬음을 받았다. 후일 청송 성수침이 기묘물론에서 공을 으뜸으로 삼은것은 사정의 소치가 아니라 학문과 덕행이 이세의 귀감이었기에 여러번 벼슬길 권유받았으나 불의를 간과치 못하는 곧은 절의는 정의로비 못했던 당시의 관해에 뜻이 없어 초연히 사관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낙일하서산 고연생원수...라는 시를 지어 선비의 후진에 규법이 있어야함을 일꺠웠다. 공이 손수 우리 족보를 수수하여 그 보궤를 삼척 중대사에 수장하니 세칭키를 원정궤라 하여 사람이 감히 범치 못하다가 2백년뒤 1718년에 이를 찾아 수보하니 충해로 2대를 실휘는 했으나 오늘 우리에게 완전한 족보가 있게된 것은 공의 선견의 공이다. 공은 산수의 취가 있어 산하를 편답하기를 즐겼으며 문장서법 화격음율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세상에서 사절이라 일렀고 유품으로는 암송규응도와 운기용흥도 두 폭이 초당동 방예손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평생을 의롭지 못한 자리에서는 서지 않겠다는 지조를 지켜 정도의 발현에 진췌했으나 시의를 얻지 못하여 1521년 10월 21일에 25세의 생애를 형장에서 마쳤다. 1540년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증직되고 상절이라 증시되었으나 그 뒤 문정으로 개시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1578년에 율곡 선생이 선조대왕에게 계청하여 불천위의 명이 내렸고 1645년에 강을 향현사에 배향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