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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기적비(복제품) 이 비석(碑石)은 〈한국금석총람〉과 〈조선사찰사료〉 및 〈건봉사본말사적〉에 비문(碑文)이 소개되어 있어 본래부터 건봉사(乾鳳寺)에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비석을 완전히 파괴하고 매몰시킨 탓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90년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술조사단에 의해 파손된 비신 파편 일부와 비좌(碑座) 및 이수(머릿돌)가 건봉사 사역 안에서 수습되었다. 이 비석은 1800년(조선 정조 24년)에 건립되었으며, 비신(碑身)은 너비 80㎝, 두께 33㎝, 높이 약 190㎝이고 전체의 높이는 294㎝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비문(碑文) 탁본(拓本)과 조사에 수습된 비신 파편 및 이수를 고증해 2017년 11월에 복제품을 제작해 건립했다. 복제된 비석의 비좌는 본래의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조사에서 수습된 비신의 파편과 이수는 새로 제작한 기적비의 주변에 전시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명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성음 임씨(任氏), 본관은 밀주(蜜州)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시 왜구(倭寇)가 조선(朝鮮)을 노략질하니 휴정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유정은 건봉사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倭兵) 2천여명을 대파하였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日本)에 건너가 왜왕을 설득하여 강화를 성립시키고,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3천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모셔온 부처님의 치아사리 10과가 왜적에게 약탈되었지만, 사명대사가 돌려 모셔와 건봉사에 보관하였다. 서산대사의 높은 절개와 사명대사의 위대한 업적은 실로 영원할 것이다. 조정에서는 유교를 존숭하여 일찍이 승려를 널리 제도시키고 사찰을 높인 적이 없었지만, 두 대사으 나라를 위한 충정을 기리고자 조정에 청하여 기적비를 세운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남공철(南公轍)이 글을 쓰고,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都護府使)가 글씨와 전액을 썼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 4월에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