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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일제강점기 경기도 지역 기념물 (기념탑 및 동상 포함) 조사 정리 카드 명칭 1 코시 마사츠나 소좌(古志正綱 少佐) 의사지비 수원 명칭 2 갑오역 코시 소좌 의사지비 건립시기 1932년 10월 1일 건립위치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 (팔달산 정상) 현 소재지 멸실 사진자료 관련자료 -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 (1937), 237~239쪽 [코시소좌의사지비(古志少佐義死之碑)] 수원군 수원읍 팔달산정의 일각에 있으며, 수원신사(水 原神社) 앞에서 등행 7정(丁) 남짓 비(碑)는 팔달산정의 남단에 있으며, 높이 23척, 비명(碑銘) 「古志少佐義死之碑」는 일청전역(日 淸戰役) 당시 오시마혼성여단참모(大島混成旅團參謀)였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 장군의 글씨로 이뤄졌다. 비의 전후에는 자연의 암석이 둘러쌌고 그 위쪽의 성벽 남단에 돌출한 대국 기계양탑(大國旗揭揚塔)을 세웠다. …… 명치 27년(즉, 1894년) 7월 26일에 용산(龍山)에 막영 (幕營)하고 있던 오시마혼성여단은 성환(成歡)의 지나군(支那君, 청국군)을 격양(擊壤)하라는 명 령을 받고, 선발대로서 보병 제21연대 제3대대는 이날 오류동(梧柳洞, 경인선)을 출발하여 도 중 수원성내(水原城內)에 노영(露營)했다. 당시 한국은 아군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기에 이르지 않았고, 더구나 경성 이외에 지역은 빈촌(貧村)이 많아서 대부대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 능한 상태였던 탓에 군량(軍糧)의 운반에는 다대한 고심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때 제3대대 는 소중한 징발한마(徵發韓馬) 54두(頭)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웬일인지 한마 전부는 마부(馬夫)와 더불어 야음을 틈타 도주하여 완전히 행방불명이 되었다. 대대장 코시 마 사츠나 소좌(古志正綱 少佐)는 이를 알고 크게 놀라 부하에게 명하여 팔방으로 전력을 다해 수색하게 했으나, 끝내 한 마리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소좌는 이러한 내용은 오시마 여 단장에게 보고했던 바 여단장도 망연자실하여 나가오카 참모(나중의 나가오카 가이시 장군)와 협의하여 일단 경성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발하려던 마침 그때에 후쿠시마 중좌(福島中佐, 나중의 대장)가 와서 퇴각의 불리한 취지를 진언하였는데, 여단장도 이를 양해하고 각병원(各 兵員)에게 가능한도의 양미(糧米)를 휴대시켜 감연히 적의 점령지 성환으로 향하여 전진할 것 을 결정했고, 27일 오전 5시 수원을 출발했다. 이보다 앞서 코시 소좌는 그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고 책임을 자신이 지고 27일 미명(未明) 팔달산록(八達山麓), 지금의 군청(郡廳) 뒤 송림에서 자인(自刄, 자결)하였다. 이내 이를 전해들 은 소좌의 부하 장병은 크게 감격하여, 29일 미명 적과 조우하자마자 분전하여 대승을 거뒀 다. 이 전투에 마츠자키 대위(松崎大尉)랑 나팔수 키구치 코헤이(喇叭手 木口小平)가 비장한 전사를 했던 것이 전사(戰史)에 남아 있는 것도 유명하다. 그리하여 코시 소좌의 자결 이래 30여유여 년, 그 영령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수원 사람 나카야마 칸지(中山勘 二) 씨 등의 주창에 의해 수원재향군인분회(水原在鄕軍人分會)는 팔달산상에 소좌의 의사비(義 死碑)를 건립하기로 되어 소화 7년 10월 1일 이의 준공을 보았던 것이다. 비고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