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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선청년가」와 「반도의용대」를 직접 부름 1937년 6월에 이른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검거되었다가 1938년 6월 대동민우회 (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 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 대동민우회는 민족주의 · 사회주의 두 진영의 사상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한 단 체로, 반(反)공산주의 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일본의 대국가주의(大國家主義) 사상 을 추종 1937년 7월 ‘사상보국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전 조선 전향자연맹’으로 결성된 시국 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의 회원으로 용산 육군기지에서 청소와 봉사작업, 각 학교의 음악교사와 각 연주가를 망라한 진정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음악가 단체 를 조직할 것을 요구하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조선음악가협회의 해산을 결정 1937년 10월 ‘음악을 통해 내선일체를 굳게 하자’는 취지로 경성음악협회를 결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에 선임 경성음악협회는 두 차례 음악회를 개최했는데, 1938년 12월 개최된 경성음악협 회 제1회 연주회에 출연 1940년 9월에는 라디오 방송에서 「지원병 장행가」 등의 가정가요(家庭歌謠)를 노래 1941년 6월 조선음악협회가 ‘음악으로 봉공하고자’ 개최한 음악보국주간 제3일째 양 악부 작곡 발표회에서 「후지산(富士山)을 바라보며」를 작곡해 발표 1941년 7월 대한제국기 최대의 친일단체였던 일진회(一進會)를 미화한 연극「북진대(北 進隊)」의 음악을 담당, 9월에는 ‘임전태세의 정비 · 강화’를 목적으로 국민 총력조선연맹의 지도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 (朝鮮臨戰報國團)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 1941년 10월 평의원에 선임, 11월 공연 수익금을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 사업기금으로 기부한 국민음악의 밤에 출연해 독창, 12월에는 대화숙 1주년 기념식에서 군가 를 제창하고 이날 모아진 성금을 해군에 헌납 1942년 1월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경성대화숙이 주최하고 경성 일보사 학예부가 후원한 ‘군가와 강연의 밤’에 출연해 군가를 부름 1942년 3월호 『동양지광』에 특집으로 실린 「싱가폴 함락에 부쳐」(新嘉坡陷落に寄 す)에서 싱가포르 함락의 감격으로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고, 세계 질서를 확 립하고,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자.고 주장 1942년 1월부터 4월까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전시 가정가요’에서 「아시아의 힘」 (アジアの力) 등을 지도, 11월에는 조선음악협회가 ‘국민음악을 확립해 일억 국 민이 대동아 성전 완수에 매진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개최한 음악경연대회의 성악부 심사위원을 맡음 성악 부문의 과제곡은 「흥아행진곡」 · 「애국의 꽃」 · 「불타는 대공(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