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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유고(諭告)를 발표 유고에서 민족자결은 조선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조선 각 지방에서 이 민족자 결의 진의를 오해하며 혹은 고의로써 곡해하야 세상을 미혹케 하며 훤화(喧譁) 를 야기하야 자기를 이롭게 하는 불령의 도배가 다유(多有)”하다면서, 이러한 행위는 옛날부터 국법이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중처벌할 것임을 강조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 개정으로 충청북도지사 1920년 7월 훈2등 서보장을 받았고, 고등관 1등으로 승급 1921년 2월 총독관방 외사과 사무관으로 발령받아 3월부터 근무, 주로 민정시찰 담당, 9 월 조선중앙위생회 위원에 위촉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 철도부 공무과 사무관 1924년 12월 전라남도지사 겸 전라남도농회 회장 1925년 5월 “조선불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 내선융화 보조, 조선인의 사상통제”를 목 적으로 결성된 조선불교단의 상담역 1926년 8월 관계를 떠남과 동시에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9년 8월, 1932년 8월, 1935년 8월, 1938년 8월, 1941년 8월, 1944년 8월 등 여섯 차례 연임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재임. 중추원 참의로 재임하면서 매년 20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1944년 8월부터는 2600원으로 수당이 올랐음 1926년 말에는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표방하고 조직한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으로 활동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1년 1월 조선수산회 부회장, 2월 경성도시계획연구회 간사,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 문 1932년 2월 조선교육회 부회장, 중추원 참의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만주 동포와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에 출정한 군인을 위문, 9월 조선유교회 명리원 법정, 12월 대일본 쇼와연맹 경성지부 지부장 1933년 3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신궁봉찬회를 발기하고 10월 고 문에 위촉 1934년 11월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하자”면서 조 직된 시중회(時中會)에 평의원으로 참여 1935년 10월 시정25주년기념표창 1937년 4월 만주사변 때 후방지원에 힘쓴 공로로 일본 육군대신이 주는 표창 1937년 8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고무하고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조직한 전조선순회시국강연단에 연사로 참여하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일대에 서 강연. 9월에도 제2차 전조선순회시국강연단에 참여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강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