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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2) 도장관(총 3대)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0명 ○ 1910년부터 1919년 사이 일제강점기 도장관 ○ 3명 모두 일본인 (3) 도지사(조선총독부)(13대)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5명 ○ 1919년부터 1945년 사이 조선총독부 도지사 ○ 일본인 8명, 조선인 5명 (가) 2대 원응상(元應常) 중추원/중추원 참의 (나) 3대 장헌식(張憲植) 중추원/중추원 참의 1920년에 함흥 육군용지 비용을 기부하고 목배 1조를 받음 1921년 2월~1923년 2월 황해도지사 휴직 1922년 2월 흥린건물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 192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 1928년 2월 사 망할 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000원의 수당을 받음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同民會)의 결성 에 참 여하여 평의원에 선출, 1926년 동민회 이사, 1927년 상담역의 직책 동민회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의 후원 아래 아세아 민족의 결합, 내 선융화, 사상선도 등을 위해 조직된 단체 일본인의 인물평에는 그의 가정은 순 일본식이다. 의식주 모두 거의 일본인의 생활상태와 다를 바 없다. 그 역시 항상 일본복을 입고 있고, 조선옷은 입지 않 는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그를 방문하면 그가 조선인임을 알지 못한 다. 대화를 나누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할 정도였다. 1928년 2월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사망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履歷書』 ; 『舊韓國官報』 ; 『朝鮮總督府官報』 ; 『朝鮮總督府 及所屬 官署職員錄』 ; 『京城日報』 1922.2.8, 1924.4.17 ; 『每日申報』 1915.8.21, 191 9.4.24, 1928.2.14 ; 『大東學會月報』 제3호(1908.4) ; 『大韓學會月報』 제4호(1908.5) ; 『大韓 協會會報』 제3호(1908.6) ; 『同民』 제1호(1926.11)~제39호(1927.12) ; 『朝鮮紳 士大同 譜』(1913.12) ; 『光州地方事情』(1917.12) 『人物評論-眞物歟贋物歟』(1917.12) ; 『咸南 都市大觀』(1938.6) ; 『黃海道道勢一班』(193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