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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 다.”라면서 3 · 1운동의 의미를 폄하 1919년 4월 3 · 1운동의 확산을 저지할 구체적 방안으로 대구자제단(大邱自制團)을 조 직하고 단장으로 활동 대구자제단은 규약에서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 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했고,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 를 배제”하기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 에 보고하도록 규정 1919년 9월 3 · 1운동 탄압에 협력한 공으로 훈3등 서보장 1921년 2월 황해도지사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 10월에는 관동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이 큰 피해를 입자 유 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유고(諭告)를 발표 1925년 3월 도지사에서 퇴임한 뒤 문관분한령에 따라 휴직. 5월 불교계의 친일어용단체 인 조선불교단 대구지부 고문과 독립사상과 사회주의 배척을 기치로 발족한 내 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경상북도지부 상담역 1927년 2월 휴직이 끝나고 면직됨과 동시에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임명, 194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500원의 수당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1년 9월 훈2등 서보장 1933년 7월 중추원의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 1934년 11월 시중회 평의원 시중회(時中會)는 1934년 8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근간으로 신생활을 통해 신흥조선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최린(崔麟) 등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조직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 25주년을 기념해 편찬된 『조선공로자명감』에 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 ·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 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다.”라는 평가를 받음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기념표창 1936년 5월 경상북도 결핵예방협회 평의원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41년 1월 8일자 『경성일보』에 “이론이 훌륭해도 실행이 없으면 공론(空論)”에 지 나지 않는다면서 지금의 “시국은 백 가지 이론보다 하나의 실행을 요구”한다 는 신년 소감 밝힘 1941년 5월~1943년 10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매년 3000원 수당 받음 1941년 10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