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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경제 지배체제를 뒷바침하기 위해 조직한 식민지 금융기관인 조선금융조합연합 회의 고문에 선임 1937년 4월 도쿄 제4구에서 중의원(衆議院) 선거에 입후보한 박춘금(朴春琴) · 이선홍 (李善洪)을 후원하기 위해 당선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음. 4월부터 조선 귀 족과 일부 사업가들과 함께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국체명징과 애국사상을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조선국방협회(朝鮮國防協會)의 설립을 추진하고 7 월에는 발기인으로 참여 1937년 8월 처 김씨가 조선 귀족 부인과 지도층 여성이 중심이 돼 금제품 헌납, 총후보 국(銃後報國), 시국인식 주입, 국방헌금 모금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애국금차회 (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달 조선총독부가 중일전쟁 이후 시국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한 간담회에 참석해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훈시를 경청 1938년 9월 8일 사망. 사망 후 특지(特旨)로 정3위에 추승(追陞). 작위는 손자 이병옥(李 丙玉)이 이어받음 이윤용이 사망하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郎)는 1938년 9월 10 일자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이윤용 남작은 구정(舊政)시대에 궁내 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군부대신 등의 현관을 역임하신 분으로 일한병합 당시는 궁중 고 문으로 영제(令弟) 이완용 후작과 함께 당시 한정(韓廷) 내외에서 일한합병에 관하여 중 외(中外) 소란했으나, 씨는 그 사이에 있어서 시대의 대세와 내외의 객관 정세를 통찰하 여 황실과 각신(閣臣) 간의 절충을 맡아 노력한 바 크며, 합병의 대업은 이에 평화하게 완성되었다. 그 공로에 의하여 남작이 수여되고 자래(玆來)로 조선 귀족의 중견으로 그 신망이 두터워져 소화3년(1928)에 중추원 고문에 취임하여, 탁월한 식견으로써 항상 총 독의 시정을 익찬(翼贊)하며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내선일체 사상 선도 에 노력을 다했는데, 이같이 급작히 서거한 것은 조선 통치상 실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 『高純宗實錄』 ; 『大韓帝國官員履歷書』 ; 『舊韓國官報』 ; 『朝鮮 總督府官報』 ;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 『(日本內閣)官報』 ; 『獨立 新聞』 1896.7.4 ; 『大韓每日申報』 1907.8.16, 12.3, 1908.6.18, 1909.7.27 ; 『皇城 新聞』 1906.6.27, 7.6, 7.18, 8.28, 10.17, 11.1, 1907.1.31, 6.28, 7.20, 7.27, 9.4, 9.11, 10.13, 11.19, 11.28, 12.7, 1908.1.25, 2.6, 2.18, 6.17, 6.18, 8.2, 1909.7.7, 9.11, 11.10, 1910.3.23 ; 『大韓 民報』 1909.7.27, 8.6 ; 『帝國新聞』 1900.10.11 ; 『新韓民報』 1910.11.2 ; 『 新韓國 報』 1909.8.24, 1910.10.25 ; 『韓民』 1936.8.29 ; 『東亞日報』 1924.1.26 ; 『朝 鮮中央 日報』 1934.7.22 ; 『每日申報·每日新報』 1910.10.8, 10.11, 1911.1.14, 1.19, 2.21 ,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