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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50원을 기부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대례식에 조선 귀족 총대로 참석한 후 처 이씨와 함 께 대례기념장 수여 1917년 5월 조선 귀족과 실업가 등 유력자들이 발기하고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주 최한 남북만주시찰단 환영 원유회에 참가, 7월에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 평의원 에 선임 1918년 10월 종4위, 12월 조선인삼회사 설립 발기인 참여 1919년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7월 경성교풍회(京城矯風會) 고문, 11월 주식 회사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國葬)때 종척집사(宗戚執事) 1926년 4월 순종의 국장때는 종척집사와 장의위원을 겸임 1920년 봄부터 1925년 3월까지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회장 및 대표이사로 조선인 전 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의 친목 도모와 내선융화(內鮮融和)에 앞장 1920년 1월부터 1923년 1월까지 한성은행 감사역, 1920년 12월부터 1923년 3월까지 관 선 경기도 도평의회원, 1921년 3월 통신교수 고등보통학회(通信敎授高等普通學 會) 고문, 4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일본관광단의 단장으로 일본행 1921년 7월 간도시찰단(間島視察團) 위원장으로 간도시찰단 환영회에서 식사(式辭), 9월 조선중앙위생회 위원 1922년 2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6월 농림주식회사(農林株式會社) 사장, 11월 조 선인과 일본인 유력자 · 자산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친일사교단체 조선구 락부(朝鮮俱樂部)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3년 1월 조선도서인쇄주식회사 창립준비위원회 발기인, 10월 교육칙어의 선전을 통 해 민족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반관반민 단체 교육실천회의 고문 1925년 5월 조선불교단 고문 1924년 6월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회원 으기관 지 『동민』이 창간되자 「축사」를 게재했고, 1926년 1월에는 『동민』 제18호 에 「칙제를 배하며」(御勅題を拜して)라는 글을 기고하여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 “제국에는 봄기운이 완연하고 화합하는 기운으로 충만하여 천황의 위엄이 온 천하를 비추시니 국가의 광택이 바다 내외에 미치고,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고, 태평함이 복되고 빛나 열국(列國)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을 바란다. … 천황 폐하 의 성지(聖旨)는 진실로 넓고 크며 끝이 없고, 우리 신민이 서로 천황 폐하의 성 심을 받들어 항상 진충보국의 단심(丹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23년 3월부터 1927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 왕실을 관리 · 통제하기 위해 일본 궁내성 소속기구인 이왕직(李王職)의 장관(친임관 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