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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 1848년 12월 출생 1882년 1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정(副司正) · 사정(司正)을 지냄 1883년 6월 중학 교수에 임명 1884년 4월 홍문관 부수찬, 5월 헌납, 11월 장령, 12월 신문국(新聞局) 주사 1885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 1886년 홍문관 부교리 · 수찬 · 부응교 1888년 4월 홍문관 교리, 7월 사복시정 1889년 5월 사간(司諫)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전라북도 익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1890년 2월 풀려남 1892년 1월 성균관 대사성, 4월 사간 1893년 8월 다시 전라남도 진도군 금갑도(金甲島)로 유배, 1894년 6월 해배 1894년 9월 내무아문 참의 1895년 4월 중추원 2등 의관, 9월 시종원 비서감 우승(右承), 10월에 제용원 상의사 장 1898년 3월 민심을 선동하고 현혹했다는 이유로 황해도 풍천군 초도(椒島)로 유 배되었 다가 6월에 풀려남 1907년 3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지원한 2만 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大東學 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달 평의원 및 경전강사에 선임 1908년 2월 대동학회 기관지 『대동학회월보(大東學會月報)』가 창간되면서 편 술과장 역임 1907년 6월 관립 한성고등학교 교관, 1908년 1월 교수로 재직 1908년 2월부터 5월까지 기호흥학회 평의원으로 활동, 9월 『기호흥학회월보』 저술원 으로 참여 1909년 10월 대동학회가 공자교회(孔子敎會)로 개편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 상의 원 및 편집부장, 1910년 편집소장 1909년 11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대 한제국 정부 · 내각 및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주최로 열린 관민추도회(官民追悼會)의 설행위원으로 위촉되어 제문담임위원(祭文擔任委員) 맡음 1910년 1월까지 사립 대동전문학교 강사로 활동, 4월 경성일보사 주최로 구성된 일본관 광단에 황실 대표로 참여해 일본을 시찰 1911년 7월 한문교양 · 문자 저술 · 서적 편찬 간행을 사업 목표로 한 문예구락 부(文 藝俱樂部) 강습소장 역임, 이후 강사로 활동 1911년 11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유에 임명 1912년 2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의 강사에 임명되어 1921년 사망할 때까 지 활 동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912년 일본인 고위관료와 조선인 친일관료 · 귀족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시 문(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