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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 空)」 · 「태평양행진곡」등 1943년 2월 ‘건전 명랑한 국민가를 부르면서 생산력 확충전에 매진하자’는 취지로 경 성후생실내악단이 주최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으로 열린 국민음악연주회 에서 「우미유카바」(海行かば : 바다로 가면)와 「이 결의」(この決意)를 개창 지도, 3월 ‘명랑한 노래를 불러 전쟁에 싸워 이겨 나갈 힘을 기르자’는 취지 로 열린 전의앙양(戰意昻揚) 국민 대합창음악회에 출연해 「아세아의 힘」 · 「십억의 진군」등을 부름 1943년 4월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음악협회가 ‘명랑 건전한 노래를 불러 국민의 사기 앙양과 총후 생활의 명랑화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전개한 국민개창운동 은 농산어촌과 공장 등 전국에 걸쳐 1943년 4월부터 5월까지, 9월부터 10월까지 두 차례 실시된 노래운동 제1기에는 약 70곡, 제2기에는 10곡의 국민가요를 선정 · 발표하고 가창지도대 를 조직해 각 지역에 파견하여 국민가요를 보급하고 지도했는데, 학교 · 영화 관 · 백화점 · 공장 · 회사 등에서도 실시 현제명은 제1기 국민개창운동에서 경기도 이천읍 가창지도대로 활동했고, 10월 에는 목포지역 가창지도대의 지휘자로 참가 제1기 국민개창운동이 끝난 8월 ‘제1기 가창운동에 대한 비판, 제2기 가창운동 실시 방안, 제2기 가창운동 국민지도곡 선정’ 등를 심의한 국민개창운동위원회 에 참여했고, 9월에는 지도자로 파견된 사람들로 구성된 지도방침에 대한 협의 회에 참여 1943년 4월 1일 경성대화숙 후원으로 설립된 경성음악연구원의 대표 및 성악지도 교수 로 활동, 7월에는 해군무관부를 직접 방문해 경성후생실내악단 제5회 공연으로 열렸던 군함헌납음악보국 대연주회의 수익금 1113원을 군함건조기금으로 헌납 1943년 8월 ‘징병제 시행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과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 경성부연맹 공동 주최로 열린 ‘야외 음악과 영화의 밤’에 출연 해 「항공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를 독창, 「반도청년의 노래」와 「우리들은 부르심을 받자왔다」를 제창 11월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하고 조선군보도부 · 국민총력조선연맹 · 매일 신보사 · 경성일보사가 공동 후원한 출진학도 격려대회에 출연해 노래, 12월 지원병익찬회(志願兵翼賛會) 종로위원회가 주최한 학병장행회(壯行會)와 지원병 익찬회 동대문위원회가 주최한 학병장행회에 출연해 노래 『녹기』 1943년 12월호에 「악단 1년 ―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활동 및 국 민개창운동을 중심으로」를 발표해 “대동아전 승리를 위해 음악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커지고 있는 시국에서 1년간 음악계를 정리하면서 경성후생실내악단과 국민개창운동의 의의를 높게 평가” 1944년 5월 조직이 개편된 제2기 경생후생실내악단의 이사장에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