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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터 유래 이곳 훈련원 터는 병사의 무술훈련및 병서,전투대형 등의 강습을 맡았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처음에는 훈련관으로 불렸는데 태종 때 이곳으로 옮겨 청사 남쪽에 활쏘기 등 무예를 연습하고 무과시험을 보는 대청인 시청을 지었으며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고쳤다. 많은 무장이 이 훈련원에서 오랫동안 시험과 봉직의 과정을 거쳤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별과 시험에서 망을 달리다가 실수로 낙마하여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곳도 이 훈련원이고, 봉사, 참군 등 하위관직이 여러 해 동안 복무하던 곳도 훈련원이었다. 중종반정(1506)때 박원종 등이 훈련원에 모여서 장사들을 나누어 배치하고 밤중에 창덕궁 진입로에 진을 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5뱍여 년의 역사를 갖고 여러 가지 군사 관계의 일을 집행하던 훈련원도 국가의 대세가 기울어짐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7년 8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일명 정미7조약)에 의해 훈련원에서 군대해산식이 거행되고 한국 군인들에 대한 무장해제가 집행되었다. 이 군대해산으로 비분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던 장병들은 일본 당국이 지급한 은사금을 거부하고 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이제까지 재래식 무기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활동하던 의병 전쟁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이인영과 허위가 중심이 된 서울 진공 작전도 신식무기와 병술에 익숙한 해산군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이들은 일본의 토벌 작전이 치열해지자 그 활동무대를 국외로 옮겨 간도와 러시아 등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