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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연은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洪冕)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잠깐 외출하였다가 정오 경에 돌아와 홍종업(洪鍾業)의 집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모여 있던 뒷산으로부터 총성이 들렸다. 이 때 그는 남양(南陽) 사람으로부터 이 총성이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해산명령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던 홍면에게 가한 발포소리이며, 이 발포로 홍면이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야구광삼은 분노한 군중을 두려워하여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망하고 난 뒤였다. 이에 그는 홍면의 동생 홍준옥(洪㻐玉)·장인 김명제(金命濟)·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김용준(金容俊) 등과 함께 추적하여 주재소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야구광삼을 도로에서 포위하였다. 이 때 이태순(李泰順)이 발로 자전거를 차서 넘어뜨리자, 왕광연은 그를 죽이라고 외치고 뛰어서 도망치는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쳐서 넘어뜨리고 투석으로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