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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187 “홍면옥 아저씨는 총 맞고, 사람들 진압하는데 제일 먼저 우리 할아버님이 소리 질렀다 고 하더라고요. ‘저 놈 때려죽이자’ 해갖고, 사람들 마음을 일으킨 거지.” 대중들의 분노에 놀란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는 자전거를 타고 급히 도망쳤고, 선생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를 붙잡아 처단했다. 그리고 이틀 뒤 주모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일본인들이 마을을 찾아왔다. 그 분노의 희생양으로 ‘정도리’ 마을에 불을 질렀고 80호의 가구가 순식간에 집을 잃었다. 송산 일대 사람들은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이 말고도 송산 곳곳에서 집이 불타오르니, 200여 채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 광분의 시간 속에서 최초로 잡힌 주모자 왕광연 선생님은 일제의 ‘집중 관리 대상’이 되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 한 이들의 입에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속속들이 나왔고, 일제는 왕광연 선생님에게 이 들과 함께한 것이 맞느냐고 종용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매번 외침에도 심문과 고문이 끊이질 않자, 끝내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자 자신의 혀를 끊었다. 왕광연 선생님의 신념과 강직함은 모진 폭력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신 것이다. 이후의 기억들 1927년, 약 8년 만에 왕광연 선생님은 출소하게 된다. 온갖 고문으로 피골이 상접하고 혀를 잃어 말조차 못하는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 했던지, 그 아들이었던 왕화식 선생님조차 알아보지 못해 마을 이웃들이 ‘이 분이 네 아버지다.’ 알려주어 알았다고 전한다. 며느리는 말조차 못하고 몸져누운 시아버지를 정성껏 보살폈다. 거동을 하지 못하니 대소변을 모두 자리에서 받아내야 해야 했다. 집안 의 가장이었던 왕광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집안을 지켜야했던 이는 왕화식 선생 님이었다. 선생님은 집이 불타버려 살 곳을 잃자 급히 초가집을 세우고 산에 밭을 갈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아버지가 출소한 뒤에는 아이들도 태어나 5남매도 책임져야 했다. 왕화식 선생님은 집이 불타고 가족을 향한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었음에도 아버지를 원망 하기는커녕 묵묵히 옆을 지켰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 광복이 찾아왔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나서서 고된 옥고 를 겪었던 왕광연 선생님에게는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을까. 왕의항 선생님은 전해 들은 그날의 기억을 말씀하셨다. “광복 소식을 듣고 나선 아이처럼 울기만 하시더래요.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혀가 잘렸 으니까. 그냥, 말없이 울기만 하시더래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의 일부이다. 왕광연 선생님이라고 하여 어찌 이 심정과 다르 지 않았을까. 모진 고문으로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몸과 더 이상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없는 입으로 그저 울기만 했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 시간이 흘러 1951년, 왕광연 선생님은 자신을 보살펴준 며느리의 손을 꼭 붙들고 눈을 감는다. 후손의 이야기 “지금 집이 옛날 집을 개조해서 살고 있는 거예요. 저 앞에는 기와고, 여기는 초가고. 자꾸만 비가 새잖아요, 이거. 내년에 수리 좀 하려고. 하하.” 집 한 켠에 모아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부모님의 사진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