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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185 자랑스러운 나의 할아버지, 나 역시 나라를 위해 앞장서리라 사강시장 길목, ‘독립유공자의 집’ 이라는 명패가 걸린 조그마한 문이 있다. 낡고 갈라져 색이 바래진 쪽문이지만, 그 옆에 사시사철 걸린 태극기는 그 순백색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온갖 풍파를 겪어도 정신만은 꺾을 수 없다는, 독립투사의 의지를 품은 듯하다. 숙연함에 몸을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복도 너머 웃으며 인사하는 왕의항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 어르신 이 100년 전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왕광연 선생님의 손자다. 48년생, 그리고 73세. 누군가의 손자이자 할아버지인 왕의항 선생님으로부터 1919년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전해 들었다. 왕의항 3월, 그날의 우리 할아버지 왕의항 선생님 댁 벽에 걸린 왕광연 선생님의 사진. 사진 속 청년은 모진 고문으로 핏기를 잃고 초췌한 얼굴로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마을 조성을 위한 조사에 임하면서 왕광연 선생님의 초상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옥중에서 모진 일을 많이 당하셨겠다고, 왕의항 선생님에게 감상을 전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저희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할아버지가 고집이 참 셌다더라고. 성품이 엄청 강직하셨대요.” 왕광연 선생님의 성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직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어느 문제 하나 느슨하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어른들 지나가는데 인사를 안 하는 아이만 봐도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위라며 꼭 짚고 넘어가기 도 했다고. 그런 왕광연 선생님에게 만세 운동은 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으리라. 일찍이 마을에서 왕광연 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홍면옥 선생님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을 지켜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 여정 도중에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 을 목도하게 되고,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라고 여겨 송산으로 돌아와 친분이 있는 이들과 항거에 대해 논의했다. 일제의 불의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분노한 왕광연 선생님 역시 소식을 접하고는 만세 운동에 함께 참여했다. 서신면, 마도면, 남양면, 서신면의 사람들이 사강시장으로 몰려든 날, 왕광연 선생님은 앞장서서 만세를 외쳤다. 뒤를 따라 장을 찾아온 대중 역시 뜻을 함께하여 만세를 부르 짖으니 그 사람이 약 150명에 달했다. 점차 사람이 늘어나 이틀 뒤에는 천여 명의 인원 이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겁을 먹은 당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는 대중을 향해 총을 격발 했다. 그 총알은 홍면옥 선생님의 어깨를 관통했고 피가 솟구치자 대중들은 아연실색 했다. 겁먹은 대중들 사이로 왕광연 선생님은 순사부장을 노려보았다. 1919. 3. 28.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 사망 당시 묘사도(출처 국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가 왕광연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