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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79 대대로 송산을 지키는 의로운 가족 독립운동가 예종구 선생님의 손자 예종길, 예종남 형제를 만난 곳은 두 분이 함께 운영하는 오토 바이 가게였다. 가게 입구에는 독립유공자의 가족임을 알리듯 깨끗한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다섯 형제 중 첫째인 예종길 선생님은 몇십 년째 태극기를 걸어놓는다며 자랑스럽게 말하셨다. 아들 네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가게 맞은편 이층집에도 태극기가 걸려있다. “저는 가게, 사무실, 집. 이 세 곳에는 꼭 태극기를 게양해요. 오래전에는 시장이나 도로에 태극 기가 만발했는데, 요즘엔 찾아보기 힘드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보라고 달아놔요. 요새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요. 태극기가 훼손되든지 말든지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렇게 각박한 세대 로 가면 잘못하다가는 잊힐 수도 있어요.” 예종길 예종남 독립운동가 예종구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예종구 선생님은 사강 지역의 부호이자 한학자였다. 집안이 염벗 1 을 운영하 여 땅을 사서 재산을 축적했다. 만세시위에 함께한 예종구 선생님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배를 타고 풍도 2 와 대부도 등지로 피신을 다녔다. 하지만 결국 체포되어 투옥 중에 논 3,000평을 처분해 석방되었다. “마산포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에서 배를 타고 대부도로 가려면 한나절은 가야 한대요. 그때는 온전히 사람 힘으로 가야하니까. 저는 할아버지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거기가 처가였거든요. 처가로 도망을 가서 피신하신 거예요. 잠잠해지면 또 나오고 그랬는데, 이왕 하시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지 도망을 왜 가.” 당시 예종구 선생님이 소유한 대지가 약 936평이었다고 한다. 귀향 이후 그곳에 학교인 마산리 강습소와 동명여관, 한약방을 세웠다. 많은 이들이 마산리 강습소에서 한글· 학문·산술을 배웠다. 형제분은 할아버지인 예종구 선생님을 직접 뵙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다니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저희에게 늘 그러셨어요. 너희 할아버지는 정말 우직하시고 정직하셨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고요.” 기억을 담고 있는 집 형제분은 독립운동가 예종구 선생님의 생가가 아직 있다며 작은 현판을 보여주셨다. 가로 60cm, 세로 30cm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나무 현판에는 붓글씨가 적혀있었다. 생가에 가면 예종구 선생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형제분은 집에 남아있는 작은 특징도 기억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이 곳곳에 닿아 있는 집이기에 더욱 그랬다. “할아버지 필체가 아주 좋아요. 아주 옛날 집에 가보면 벽이나 기둥에 붓글씨가 있어 요 . 한 100년이 넘다보니까 안 뽑혀요. 잘못하면 부수겠더라고요. 지금은 하나만 가져 다 놨는데 이것도 좀 훼손 됐죠. 집이 오래돼서 쓰러지려고 하는데 나중에 다 잘라서라 도 가져오려고요. 지금 두 개가 남아있어요. 전에는 벽에도 붓글씨가 가득했어요.” 오토바이 가게 기준, 5km 떨어진 곳에 독립운동가 예종구 선생님의 생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형제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오래된 한옥은 세월을 그대로 지 1 소금을 끓여 정제하는 방식. 2 현재의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한 섬.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