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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171 형제가 기억하는 큰할아버지 문상익 1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은 측량 기술을 배웠다. 결혼 을 한 뒤 수원 북문 근처에 자리를 잡아 측량기술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자식이 없어 근심 걱정이 많았다. 문상익 선생님은 동생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삼아 공부시키고, 친척이나 지인의 자식에게 방을 내주며 후학을 양성했다. “제사란 제사는 다 그 집에서 지냈고, 추석이나 설에도 그 집으로 갔는데 굉장히 좋았 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 2층 집에 과수원도 있었으면 꽤 부자였죠. 선산을 사서 12 대 도평 할아버지도 다 모셔온 거예요. 그런데 문상익 할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서 그랬는지 자손이 없었어요.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셨는데 그분도 굉장히 공부를 잘하셨다고 해요. 계속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면서 공부시키니까 결국 서울대 농대를 들어가셨대요. 문상익 할아버지는 가족이든, 조금 아는 사이든 수원에 공부하러 온다 고 하면 방을 내줬어요.” 두 형제의 기억 속에서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은 호랑이 같은 분이셨다. 누구에게나 옳은 소리를 하고 부당한 일에는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우리가 봐도 어렸을 때 굉장히 꼬장꼬장한 분이셨어요. 예를 들어서 제사를 지낼 때 맨 뒤에서 애들이 장난친다고 웃으면 야단을 무지하게 맞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외골수 같으셨던 점이 남의 생각보다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신 분이셨어요.” 두 분은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것도 의도치 않았다고 한다. 1970년 대에 정부는 독립유공자를 찾기 위해 우선 재판 기록을 참고했다. 그 과정에서 문상익 선생님의 이름과 정보가 기록된 것을 확인했고,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한테 연락이 온 거에요. 이걸 따로 신청하려고 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재판 기록에는 50명 명단이 다 나오는데 거기에 문상익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그 때 주동했던 홍면옥 씨가 나와요. 그 분이 우리 윗집 살았던 분이에요. 문상익 할아 버지랑 학교도 같이 다니셨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똑똑했던 분이셨어요.” 우리가 어렸을 적에 형제분이 어렸을 때만해도 사강에는 성한 집이 없었다고 한다. 담장 없이 흙을 쌓아서 올려 만든 집이 대다수였다. 엉성한 집들은 곧 찌그러질 것 같았다고 한다. “우리 어렸을 때는 동네가 전부 못 살았어요. 집을 어떻게 지었냐하면 언덕진 땅 아래 쪽에 서까래를 얹혀서 그 안에 들어갔어요. 겨울에 가보면 그 집이 오히려 따듯해요. 이 정도로 어려워서 다들 빨리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70년대 중반까지 기술을 배 우거나 공부한다고 외지로 다 나갔어요.” 광복이 됐을 때는 온 사강 시내가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두 형제가 할머니께 듣기로는 그렇게 사람이 많은 광경을 처음 보셨다고 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기쁨 도 잠시, 이내 닥친 6.25 전쟁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문기남 선생님은 여섯 살 즈음 6.25 전쟁이 터져서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6.25 전쟁을 안다고 했다. 졸업식 날, 문기승 형제분 할머님 회갑연 군복무 시절, 문기남 형제분 조부모 결혼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