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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169 문상익 할아버님처럼 당연히 나서야죠 틀림없습니다 직계 자손이 없는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 위해서 종손인 문기남, 문기승 형제분을 만났다. 형님인 문기남 선생님은 현재 서울에서 한국과 독일을 잇는 무역업 을 하고 계신다. 동생분인 문기승 선생님은 송산중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힘쓰고 계신다. 형제분은 큰할아버지인 문상익 선생님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과거 송산을 떠 올렸다. 두 분이 들려주시는 부모님과 할머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독립운동 당시 상황과 송산 지역 발전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문기남 문기승 만세를 외친 면서기 두 분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집안 내력을 설명해야 한다며 족보를 보여주셨다. 남평 문씨 11대조부터 송산면에 정착해 집성촌이 형성됐다.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도 송산 면에서 태어난 토박이였다.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공부했고, 스스로 외국인 선교사가 운 영하는 학교에 입학해 일본어, 영어를 배우기도 한 인재였다. 송산에서 3.1 운동이 벌어진 당시 송산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면서기가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게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의롭게 참여하셨더 라고요. 문상익 할아버지가 감옥에 잡혀가시고 집안이 난리가 났어요. 재산을 몽땅 팔았 다고 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호랑이 껍질이 있었는데, 그것까지 몽땅 처분했대요. 왜냐하면 일본인 변호사를 네 명을 쓰고, 한국인 변호사를 세 명을 써서 사형 선고 받은 걸 살려온 정도였으니까요. 팔다가 나중에 팔 게 없으니까 우리 집도 팔았어요.” 독립운동가 문상익 선생님을 살리기 위해 가족들은 윤택한 생활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사강 지역 가옥에 방화를 하면서 삶의 터 전마저 사라져버렸기에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졌고 결국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옛날 본가 위치는 내가 정확히 알아요.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본가 자리가 동네에 서 가장 가운데에 있다고 그랬어요. 굉장히 넓은 자리여서 대문이 세 개나 있었어요. 사랑방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서신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데, 우리 동네 앞을 지날 때는 말을 내려서 가야하는데 누가 말을 타고가면 ‘저 놈 붙잡아라.’ 해서 볼기를 때렸대요. 세도를 과시할 목적이었던 거겠죠? 그 정도였는데 1919년 3월 28일 이후에 다 불타버 린 거예요. 형제분이 보여주신 족보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