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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159 운동 참가자의 인식이나 경험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어 보인다. 2 1919년 3.1 운동은 행정구역인 단위로 전개되었다기보다는 전통적인 생활권에 따라 전개되었다. 일제시기 수원군에 해당하였던 송산면의 경우, 향남면이나 수원면의 3.1 운동과 연계되었다기보 다는 송산면의 전통적인 생활권, 즉 서신면·마도면·송산면 등 같은 생활권을 공유하는 지역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양상이 뚜렷하였다. 따라서 행정구역 단위로 3.1 운동을 연구 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3 송산 지역 3.1 운동과 당시 참여자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신문조서, 판결문, 일제감시자대상카드, 형사공소사건부 등이 있다. 신문조서 등 송산 지역 3.1 운동 재판자료 는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1~22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수원군 만세시위사건’이란 제목으로 마이크로필름(4개 Roll, MF07527~MF07530)이 있는데, 이 마이크로필름에는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1~22권)』에 누락된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 되어 있어 연구적 가치가 크다. 4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1~22권)』에는 체포부터 신병 인치, 사법경찰관 및 검사의 신문조서, 공판조서, 시말서, 예심청구서, 공판시말서 등 관할 재판소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사법경찰관과 검사의 신문(訊問) 과정이 수록되어 있어 송산 지역 3.1 운동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5 이 조서와 재판기록을 바탕으로 송산 지역 3.1 운동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26일, 구장 홍면선의 집에서 호세를 납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홍효선이 “다른 지역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부르자.”고 제안하자 만세를 부 르기로 결의하였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뒷산에서 오후 4시경에는 주민 100~200명이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구한국 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수십 명이 면사무 소로 들어가 면장과 서기들에게 만세를 외치게 했다.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 근은 물론이고 마을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고, 저녁에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해 밤 11시경 에 해산하였다. 6 3월 26일에 이어 27일에도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마을을 돌았다. 면사무소 앞에서 약 200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육일리 방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사강주 재소 근무 순사보 장용남(張龍南), 남양경찰관주재소에서 지원 나온 순사 다케우치(竹內 2 3.1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우정면, 장안면, 송산면, 향남면 등에서 현장조사를 벌인 결과, 대부분의 주민 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전승되고 있는 만세운동은 서울에서의 전파나 조직적 연대라는 측면보다는 면 단위 또는 마을 단위로 분리되어 전개되었다는 내용이다. 생활권이나 출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쪽과는 다르다.”는 구분 의식이 뚜렷하다. 3 허영란, 「만세시위의 다원적 의미와 지속되는 지역공동체-안성군 3.1운동의 새로운 이해-」, 『역사와 현실』 2019년 9월호 참조. 4 마이크로필름에는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1~22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민적부, 소행조서 원본이 실려 있다. 5 이용창, 「재판 관련 기록으로 본 화성 장안·우정 3.1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2집 참조. 6 高 第9146號,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9보)」, 『大正8年乃至同10年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共7冊 其7』 참조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 외상, 재판 당시 감정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皆吉)와 순사보 2명 등 순사 4명이 육일리 방면으로 출동하자 시위대는 1시쯤 해산하였다. 7 1919년 3월 28일 사강장날,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 서 구한국 국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서신면 방면, 송산면 중송 리 방면에서도 태극기를 내세우고 만세를 고창하며 몰려 왔다. 오후 3시경 시위를 진압 하기 위해 출동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와 다케우치(竹內皆吉) 순사, 정인옥(鄭 寅玉)·김학응(金學應)·조종환(趙鍾桓) 순사보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여 주 도자 홍효선과 예종구를 체포하였다. 이어서 나타난 홍면옥에게 본인임을 재차 확인한 후 체포하여 꿇어앉혔다. 그러나 홍면옥이 이에 굴하지 않고 연속하여 만세를 외치자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홍면옥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총상을 입혔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순사 를 때려죽여라.”고 외치며 노구치를 처단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송산 일대에 군경을 투입해 대대적인 주동자 검거에 나서는 한편,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워 200여 호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4월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 까지 사강을 중심으로 인근 송산·마도·서신면의 20개 마을을 수색하여 175명을 검거 하고 1,202명에게는 서약서를 받고 훈방 조치하였다. 3월 26일 만세사건 발생 후 3일 만인 3월 28일 5시경 홍면옥, 홍준옥, 김명제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특별 검거반의 검거에 따 라 홍면옥을 포함한 29인은 수원경찰서에 유치되었다. 수원경찰서장 경부 후루야(古屋淸威) 7 騷擾事件ニ關スル件」, 『洪冕玉外 31人 保安法違反 騷擾 殺人』 (1919년 3월 28일 송산면 만세시위 및 순사살해 사건에 대해 남양경찰관주재소 순사 다케우치(竹內皆吉)가 수원경찰서장에게 올린 보고서) 참조. Part 03 송산 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송 산 지역 만세운동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