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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57 송산 지역 만세운동의 전개 많은 이들이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의 항거라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송산은 달랐다. 염전지대와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던 송산 일대의 주민들은 불의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송산에서 일제가 쏘아올린 총탄 하나가 천여 명의 공분을 샀고, 향후 경기도 전역에 만세운동 의 불씨를 퍼트린 계기가 되었다. 이에 송산 지역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전문가, 이혜영 학예사의 글을 통해 3월 송산 지역 독립운동의 전개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하 글은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에서 발간한 『수원학 총서 2-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의 53~65p, 이혜영 학예사가 작성한 ‘송산 만세운동의 전개’를 인용 하였음을 알린다. 3.1 운동은 흔히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운동으로 규정되곤 한다. 그러나 송산 지역 3.1 운동 은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3.1 운동 성격 규정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례이다. 즉 송산면과 이웃하고 있는 장안면·우정면 만세시위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었고 일본 순사가 시위대에게 타살되었다. 이에 송산면과 장안면·우정면은 3.1 운동 당시 가장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된 대표적 지역으로 뽑힌다. 1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에 대한 연구가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중 에서도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원인을 밝히려는 데에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으며, 그 결과 주요 원인으로 경제적 수탈이 지적되어 왔다. 즉 지역민들의 경제기반인 염전 과 농토에 대한 수탈 심화 등이 격렬한 만세운동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는 우정면·장안면·송산면에서 전개된 3.1 운동의 격렬성이 수탈의 정도에 비례한 것 이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경제적 수탈이 심화될수록 저항도 격렬하게 전개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수탈=저항이 정비례한다는 설명이 송산 지역 3.1 운동에 부합하는지는 좀 더 검토해보아야 한다. 또 한 3.1 운동은 일제에 의해 개편된 행정구역 또는 현재의 시·군 행정구역을 단위로 연 구되고 있다. 그러나 행정구역을 단위로 3.1 운동을 이해하는 방법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는 3.1 운동의 이해는 1 3.1 운동 당시 일제 관헌 사망자 숫자는 총 8명으로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4명, 성천군 성천면 1명, 맹산군 맹산읍 1명,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1명, 송산면 1명이다.(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3.1 운동 편 1)』, 1977, 357~443쪽) 대부도지도 송산면 일대 확대, 1919년 제작(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송산면 3.1 운동 사건 송치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송산 3.1 운동 주도자 홍면옥의 신문조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Part 03 송산 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송 산 지역 만세운동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