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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153 1919 격동의 해, 1919년. 고종황제는 눈을 감고, 저 멀리 일본 도쿄에서는 재일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3월 1일에는 경성 태화관 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을 발표하 였고, 수많은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 만세를 외쳤다. 그 열기는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경기도 서부, 송산 지역에도 불씨 하나를 놓게 된다. 3.26. ~ 3.28. 송산 지역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던 일자이다. 3월 26일, 음력 2월 25일을 기점으로 3일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실시하였다. 수차례의 해산 명령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연일 진행한 당시 상황은 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느끼게 한다. 1000 송산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민중의 숫자다. 사강리 주민만이 아닌, 사강시장을 찾아온 인근 송산 일대 육일리, 봉가리, 중송리, 삼존리, 고포리, 마도, 서신, 남양, 비봉, 수원, 오산 등지의 민중이 만세 운동에 함께 응했다. 각지에서 찾아온 이들 의 참여 덕분에 화성 전역, 경기도 일대에 만세 운동의 열기가 퍼지게 되었다. 15:30 만세운동을 진압하려 나선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처단될 때의 시각이다. 그는 엄포에도 민중이 해산 하지 않자, 총기를 발포했다. 그 총알은 홍면옥의 어깨 를 관통했고, 주민들은 노하여 순사부장을 쫓아 투석 하였다. 끝내 도주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쓰러 지고, 수백 명이 돌과 곤봉으로 그를 처단하였다. 211 만세운동이 끝난 뒤, 일제는 대대적으로 수배명령 을 내렸다. 송산 일대를 찾아온 검거인원들은 수배과정에서 무차별적 폭력을 일삼았고, 끝내 가옥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송산, 마도, 서신 일대의 9개 지역에서 총 211호의 가옥이 전소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홍헌 선생은 개인 소유 산지의 나무를 내놓아 그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곤 했다. 숫자로 보는 송산 지역 만세운동 Part 03 송산 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숫 자로 보는 송산 지역 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