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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13 “우리 애들하고 손주하고, 우리 집안이 그렇게 훌륭한 집안이었냐고 좋아하더라고. 광복 회에서 우리 손주 중국에 상해임시정부 있는 곳도 데려다 줬더니 애가 계속 이쪽에 대 해서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게 얼마나 기특해.” 어릴 적 나의 살던 고향은 생활고에 치여, 주변을 돌아볼 새 없이 살아왔다고 말씀하신 홍정희 선생님. 그런 어르신 에게도 혹여 고향에 얽힌 밝은 기억은 없을까 싶어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다. 네다섯 살에 할아버지, 아버지를 모두 잃은 소녀의 세상에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다. 그렇게 할아 버지와 아버지의 언급을 꺼렸던 어르신의 어머니지만, 제삿날마다 꼭 묘소를 찾아뵈었던 것은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씀하셨다. 소쿠리에 부침개 가득 담아, 어린 홍정희 선생님의 손을 꼭 붙잡고 갔었더라고. 옛날 마을에서는 학교 운동회가 그렇게 큰 잔치였다고 한다. 학부모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모여 시간 보내던 그때 그 시절. 특히 어머 니가 만들어온 송편이 그렇게 맛있어서 여태껏 잊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옛날에 운동회 같은 건 크게 했잖아. 마을 사람들 다 와가지고 축제지. 엄마가 이제 운 동회 때면 송편 쪄가지고 와서 같이 먹고 했던 기억이 나요. 옛날에는 운동회가 그나마 엄마들이 쉴 수 있었던 날이었던 것 같아. 항상 바빴잖아요.” 옛날에는 교도소에서 마을 농사일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를 나오곤 했다고도 전하셨다. 마도 지역으로 이사를 갔을 때의 일인데, 모내기철이면 일을 돕겠다고 봉사를 나왔더 란다. 그들에게 고생한다고 어머니가 몰래 담배를 쥐어주면 그렇게 좋아했다고. 홍정희 선생님은 봉사 나온 이들에게 새참 가져다주던 때를 떠올리며 슬하에 딸 하나 둔 어머 니는 그분들을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교도소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그 인근에 염전자리가 있었다고도 말씀하셨다. 종종 수감자들이 염전 일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는데 이 자리가 오늘날의 화성시 마도면에 위치한 외국인보 호소다. “옛날 간척하기 전엔 바다가 지금 화성 안쪽까지 들어왔으니까. 우리 이모하고 조개도 잡으러 다니고. 갯벌에서 조개 기다란 거 잡기도 하고 그랬어. 발 한 번 빠지면 못나오 고 그랬지.” 자랑스러운 할머니 초등학교를 나오고, 이 이상 학업에 몸담지 못한 홍정희 선생님은 요 근래 고등학교를 다 니고 있다. 아이들 교육, 먹고 사는 문제로 한때 접어두었던 삶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또한 20년 전부터 YMCA 소속으로 시작했던 봉사활동도 꾸준히 활동 중이시다. 자살방 지에 대해 공부를 하셔서, ‘자살 지키미’로 사람들을 돕고 계신다고. 몸이 따라준다면 대학 에도 들어가 복지를 공부해 더 많은 이들을 돕고 싶다며 소망을 전하셨다. 홍정희 선생님의 집은 태극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깃발의 크기와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할아버지인 홍문선 선생님이 독립운동가이었음을 알게 된 후부터 모으셨느냐 하니 그 이 전부터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나지만, 우리 남편도 보통 애국자가 아니야. 저기 창가에 있는 국기봉도 돈 주고 만들었고. 그냥 옛날부터 국기를 열심히 달았어.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다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왔지. 나도 피 속에 조금 그런 기질이 흐르긴 했나 봐.” 할아버지, 홍문선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로서 정식 추서가 된 이후에는 여러 가지 독립 운동 관련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 말씀하셨다. 광복회에서 강의를 한다 하면 놓치지 않고 꼭 참여해 독립운동의 가치에 대해 수도 없이 되새기셨다. 그 덕에 손주가 독립운동사에 대해 물어보면 무엇이든 막힘없이 대답하는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었다 말씀하신다. 그런 홍정희 선생님에게 할아버지 홍문선 선생님처럼 나라에 위기 가 닥친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느냐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야죠. 아유, 당연히 해야지. 그래서 봉사활동 다니고 하 는 것 아니겠어요.”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행동을 하시겠냐는 질문에는 이미 일상 속의 실천으로 답을 하 시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알고 나서도 오랫 동안 가슴에 묻어두어야 했던 홍정희 선생님. 그럼에도 곧은 심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잃지 않으셨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어르신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우리 할아 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며 꼭 찾아달라고 연신 당부하셨다. 이번 독립 운동가 마을 조성을 통해 조명받지 못했던 영웅들을 다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꼭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