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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11 가슴에 묻어둔 우리 할아버지 활기 넘치는 시장과 좁은 골목을 지나 홍정희 선생님이 기거하시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 바깥에서 화초에 물을 주는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니, 환하게 웃으시며 밖이 추우니 어서 들어가 자며 손잡아 이끄셨다. 여느 할머니가 손주를 대하듯, 푸짐하게 차려진 과일 한 상과 따뜻한 커피 를 내놓으시고 어서 챙겨먹으라 하셨다. 한 입, 두 입 챙겨먹어도 전혀 줄지 않는 홍정희 선생님의 환대에 배가 부를 지경. 홍정희 선생님에게 할아버지 되시는, 홍문선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내자 어르신의 눈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송산에서의 독립운동, 그날 홍문선 선생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순사부장의 처단에 앞장서는 등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 기억은 희미해져서 한참이 지난 오늘날에서야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다. 홍문선 선생님은 어째서 잊혀진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어떻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수난기를 홍정희 선생님을 통해 들어보았다. 홍정희 사는 게 바빠서, 어려워서 홍정희 선생님은 어릴 적,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어야 했다. 두 분 모두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떠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전하셨다. 그 나이가 네다섯 살이 채 되기 전이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도 몇 없던 고모들도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에 남은 가족이라곤 어머니 밖에 없었고, 두 여인은 서로를 의지하며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소녀였던 홍정희 선생님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하여 고향을 떠나 인천 으로 몸을 옮겼다. 아이를 낳고 10년이 흘러서야 시댁에서 분가해 서울로 이주했다. 그렇다고 그리운 고 향에 자주 찾아가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땅한 차편도 없었고 어린 아이들을 보살 펴야 했기에 어르신의 어머니가 가끔 찾아와 머물다 돌아가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나이가 들어 가끔씩 어머니가 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더란다. “얘야, 유공자인가 그거 하면 혜택이 있더란다. 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었어. 그 런 게 있댄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아도, 답하는 것을 꺼리셨다고 말 씀하셨다. 젊은 나이에 부군과 사별한 상처가 깊었던 탓일까, 이사를 다니면서 남아있 던 두 분의 사진도 모두 그 자리에 버려두어 찾아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나마 남 아있던 묘소도 학교가 들어선다고 하여 파묘를 했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흔적들이 세 월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홍정희 선생님도 점차 할아버지를 가슴 속에 묻어두 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어머니가 전해주었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식도, 삶에 치여서 차마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 되시는 홍명선 선생님이 유공 자로 서훈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혼자 남은 홍정희 선생님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위해 내보일 자료 하나 없어 눈물만 삼켜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몇 년 전 일이야. 전화가 와서, 홍문선 선생님 후손 되시느냐고. 우리 할아버지 독립운 동가 훈장 받으신다고. 우리 형부도 전화 오고. 같이 가서 훈장 받고, 평생 한 풀었어. 그때 막 울었어. 생각만 해도 눈물 나고, 고맙고.”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2016년에서야 홍문선 선생님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애국장 을 추서받고 독립운동가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홍정희 선생님은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면서 쌓인 설움이 모두 가신 것만 같다고 말씀하셨다. 기쁜 소식을 자녀들에게도 전 하니, 다들 너무나 좋아하더라고, 울음을 그치시고 환하게 웃으셨다.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