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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203 노블리스 오블리주, 대를 잇는 미덕 사강시장을 거닐다보면,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병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에 새겨 놓은 ‘홍의원’ 세 글자. 색 바랜 창문의 십자 스티커와 칠이 벗겨진 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홍의원 의 안주인, 김현순 선생님이 나와 우리 기록자들을 반겨주신다. 뒤이어 만난 홍완유 선생님 역시 웃음을 만개한 채 악수를 건넨다. 병원으로 들어서자 병상침대와 의약품 너머로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가족사진들이 보인다. 이런 병원이라면 의사 앞에서 잔뜩 긴장하기보다 여느 시골집에 온 듯 편히 진료 받을 수 있으리라. 홍완유 선생님은 말문을 꺼내기가 무섭게 우리가 찾아오길 기다리신 듯 당신의 할아버지 홍헌 선생님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셨다. 홍완유 김현순 집을 잃은 이들에게 나무를 내어준 청년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만세운동.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송산 일대 주민들이 얽혀 엄청난 규모의 일이 벌어졌다. 참여한 인원수만 천여 명에 육박 했다. 그런 대중에 겁을 먹고 총탄을 발사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 분노한 민중은 그를 처단했고, 일제는 보복을 위해 송산 일대에 방화를 일삼았다. “일본 사람들이 이제 보복으로 불을 지르고 쏴죽이고 그랬어. 여기 송산에 사강리, 본가 리, 삼존리, 육일리 이렇게. 불타버린 집이 200여 채야. 수라장이 됐었지.” 수많은 사람이 며칠 사이에 집을 잃게 되었다. 거리와 들판으로 내쫓긴 이들은 당장 기 댈 곳이 없었다. 이들을 애석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홍헌이라는 청년이었다. 1899년에 태어나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홍헌 선생님은 제법 부유한 집의 장손이었다.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 양반집의 장손이며,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 등으로 집안에서 만 류해 직접 만세 운동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항상 주의 깊게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였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의 방화로 집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홍헌 선생님은 자기가 소유한 산을 모두 내놓아 사람들이 집 지을 나무를 베어가도록 했다. 덕분에 사 람들은 희망을 얻을 수 있었고, 몸 뉘일 조그만 집이나마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비극이 찾아왔다. 홍헌 선생님의 고모부 되시는 분이 만세운동에 참여했 던 것이 화근이 되어 종로경찰서에 조사차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원체 몸이 약했던 홍헌 선생님은 조사받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여, 집에 돌아온 뒤로 각혈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920년, 꽃다운 나이의 홍헌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을 사 람들은 홍헌 선생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없는 형편에도 돈을 모아 은주전자 독립운동가 홍헌 이재민 목재 배급표(출처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