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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199 “홍남후 할아버지는 석방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어요. 홍열후, 홍관후 할아 버지는 두 분이 모두 82세까지 사셨어요. 마을 군데군데에서 글을 많이 하신 분들이 글 방을 운영했어요. 홍열후 할아버지도 얘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쳤어요. 글씨를 정말 잘 쓰셨거든요. 독립운동가 중에 홍헌이라고 불나서 집 없는 사람들한테 나무를 내어 준 사람이 있는데, 그 분 만장을 우리 할아버지가 쓰셨어요.” 독립운동가 홍헌 선생님은 독립운동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뒷산에 있는 나무를 무료로 내어준 은인이었다. 홍사웅 선생님의 할아버지들도 독립운동가 홍헌 선생 님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가 죽자 그를 위한 만장을 쓰고 은주전자와 은잔을 선물한 것 이다. 한편, 집안 곳곳에는 독립운동가 홍열후 선생님이 쓰신 글이 가득했다. 부드럽고 깔끔한 필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가 목격한 그날들 홍사웅 선생님은 어린 시절 상당히 어렵게 살았다며 과거를 회상하셨다. 특히 학교를 다닐 때 신발을 못 신고 가서 매일 맨발로 다녔다. 겨울이 되면 그나마 일본식 짚신을 신고 다녔는데 이마저도 거센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울에는 우리가 짚신을 틀어서 ‘와라지’라는 것을 신고 다녔어요. 짚을 엮어서 여기 엄지발가락에 끼워서 신는 건데. 볏단으로 만드는 거야. 마를 엮어서 신으면 아주 튼튼 하고 오래 신는데 짚신은 겨울에 며칠만 신으면 쭉쭉 금방 늘어나. 못써.” 지금은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짚신을 볼 수 있다며 밝게 웃으셨다. 홍사웅 선생님은 발이 아프도록 시렸던 과거도 이제는 추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두 눈으로 목격 하며 자랐기에 마음의 추위와 고통도 컸다. 특히 일본군이 마을 사람을 강압적으로 탄압 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장면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어려서는 일 년에 두 번 청소를 했어요. 청결이라고 했는데. 순사들이 직접 마을로 나와요. 나와서 잘못하면 여자고 뭐고 없어요. 그냥 때리는 거예요. 우리 집에 대들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병풍을 털어서 대들보에 얹어놨어요. 분명 털어서 얹어놨는데 순사가 와서 막대기로 미니까 훅 떨어졌어. 그러니까 먼지가 풀풀 나니까 이게 청소한 거냐고 그러 면서 우리 어머니를 때린 거예요. 뺨 맞으시는 걸 내가 봤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무렵 일제의 탄압을 더욱 심해졌다. 식량 문제가 심했는데 죽이나 소나무를 고아서 먹었다. 이렇게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많이 먹는 거였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7년부터 계속 흉년이 들었다. 7년 동안 내리 농사가 수포로 돌 아가자 벼 한포기 수확하지 못했다. “쌀이 아니라 벼를 가져가요. 콩 이런 것도 다 공출해 갔어요. 우리는 안 뺏기겠다고 나무 밑이나 땅에 묻어봤는데 순사들이 와서 꼬챙이나 나무로 쑤셔도 보고 그랬대요. 한 번은 보리쌀을 독에 넣어서 땅에다 파묻어 봤더니 반이 썩었더라고요. 돈을 아주 조금 주고 뺏으러 다닌 거예요. 나무도 사강리에 느티나무 커다란 게 있었는데 송산면 사람들을 전부 동원해서 마음대로 베어갔어요. 그걸로 뭘 했는지는 몰라요. 우리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을 먹고 자랐어요.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하얀 수액이 나오는 데 이걸 먹으 면 변비가 생겨.” 홍사웅 선생님의 학창 시절에도 일제강점기라는 그늘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늘을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다. 홍사웅 선생님은 송산초등학교 20회 졸업생이다. 과거에는 송산학교로 불렸는데 처음 입학할 당시에는 교무실 하나, 교실 넷이 전부였고 사학년 밖에 없었다. 그러다 학교를 증설할 때 송산 지역 주민들이 부역을 하러 끌려갔다고 한다. 소나무를 전부 베어서 터를 닦았고 마을 주민들이 등짐을 지고 학교를 증축했다. 청년훈련소에 대한 기억 “나도 부역을 하러 끌려가고 그랬어요.” 사강리에서 보국단이라고 한 달 남짓 부역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한다. 보국단은 주로 비행장을 닦는 일을 했다. 명칭은 지원병이었는데 21살이 되면 가야 했다. 홍사웅 선생님도 당시 일본 군인이 교사로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식 훈련을 받았다. 다행히 나이 때문에 보국단에 가지는 않았지만 청년훈련소에 가야 했다. “한번은 일본에서 보국단 징병 통지가 날라 왔는데 그 때 청년훈련소 교관이 우리를 가르 치는 담임선생이야. 그걸 가져가서 보여줬더니 그이가 면제를 시켜줘서 나는 보국단도 안 나갔어요. 내가 1940년에 18살이니까 나이가 미달이지. 스물한 살만 됐으면 나도 끌 려갔지. 청년훈련소는 지금 송산초등학교에 있었어요. 아침 아홉 시에 나가서 두 시간 정도 군사 훈련을 하는 거예요.” 청년훈련소는 각 지역마다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나면 투입하기 위하여 지역 청년들 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명칭은 지원이었지만 실상은 나이가 되면 다 가야하 는 강제적인 사항이었다. “당시에는 공출을 해서 전쟁터로 군량미를 보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배를 열 척 보내면 한 척밖에 못 갔대요. 다 수장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기 전쟁터에 나간 사 람들도 못 먹고 배를 곪았을 거예요. 청년훈련소도 밥은 안 줬어요. 학교 선생님이 전 부 일본인 군인 출신인데, 그 사람들이 청년훈련소 훈련도 하고 그랬죠.”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