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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들고 일제에 맞선 부산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朴次貞) 의사 (1910.5.8.~1944.5.27.) 서기 1910년(융희 4년) 5월 8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북천동 417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連)(1993~1971) 사이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박용한은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으로, 1918년 1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1925~1929년 당시 호주 장로교가 운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에서 수학(29회 졸업)하였다. 재학 중 교지 『일신』에 게재된 소설 「철야(徹夜)」, 시 「개구리 소래」,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을 통해 식민지 조국 현실을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시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회운동(1924~1930) : 조선소년동맹, 근우회 - 당숙 박일형(朴日馨)이 당시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있던 가운데, 1924년 5월 박차정은 일신학교 입학 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재학 중에도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 동래지부, 동래노동조합, 신간회 동래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일신학교 졸업 후 1929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상무위원으로 조사연구부, 선전부, 출판부 등을 맡았다. 1929년11월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동년 2월 부산방직 파업사건 주도 혐의로 동래에서 다시 피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항일무장투쟁(1930~1944) : 의열단 - 병보석 중이던 1930년 2월말 첫째오빠 박문희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 당시 중국에 있던 둘째오빠 박문호의 주선으로 의열단에 합류,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3월 의열단 의백(義伯) 김원봉(金元鳳)과 혼인하였다. 1932년 중국 난징[南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 부녀부주임으로 활동하고, 1936년 지청천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선전홍보를 담당하며, 산하 군사조직 조선의둉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던 가운데,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重慶]에서 사망하였다. 1946년 2월 김원봉은 환국하여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본가가 있는 경남 밀양 감천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