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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박문호(朴文昊) 의사 (1907.10.16.~1934.10.3.) 서기 1907년(융희 원년) 10월 16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북천동 405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連)(1993~1971) 사이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18년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내성초) 졸업 즈음,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인 부친 박용한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사회운동(1925~1929) : 동래청년동맹 - 1924년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취업하였으며, 1925년 동래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형 박문희와 당숙 박일형(朴日馨, 일명 朴孔杓)(1904~?)이 당시 동래지역 청년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일형은 1919년 동래 기장 지역 3.1운동을 주도하엿으며, 1925년 동래청년연맹 결성을 주도, 1926년 7월 동래청년연맹 상무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 2월 동래청년동맹 결성을 주도, 5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 경남청년연맹 집행위원 및 순회강연대원, 8월 동래노동조합 정치문화부 간사, 1929년 1월 신간회 동래지회 사무재정부 간사, 4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당활동(1929~1931) : 의열단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 1929년 3월 동래누룩조합 공금 1,500원을 가지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인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외당숙 김두봉(金抖奉)(1889~1961)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정해리(鄭海理)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베이징에 있던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박건웅을 소개받았다. 박건웅의 소개로 9월에 화북대학 사회학부에서 수학하면서 11월 김원봉과 박건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가입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베이핑[北平] 지부 선전부 책임자로 있던 1930년 2월, 국내 근우회 활동으로 투옥되어 병보석 중에 있던 여동생 박차정을 중국으로 망명시켰다. 수감(1932~1934) - 1931년 10월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공사관의 단속을 피해 텐진[天津]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하던 중, 12월 조선인의 밀고로 텐진 주재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다. 이때는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및 부설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고나련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단지 1929년 동래누룩조합 공금 횡령만이 문제가 되어 1932년 6월 나가사키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우라카미[浦上]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3년 9월 만기 출소하였다. 하지만, 출소 1개월만인 1933년 10월초,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을 수사하던 일경에게 관련 행적이 드러나게 되어 동래 자택에서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4년 4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9월초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1934년 10월 3일 부산 동래에서 사망하였으며 동래 청년단체 주도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2019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