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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구 신암선열공원 묘지 한자락에 애국지사 박영진 육군 대위가 영원히 잠들고 있다. 박지사의 본적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동이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살 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한 아버지 박만수 님과 어머님 동래 정씨 사이에서 1921년 3월 27일 심양에서 출생하여 이국 땅에서 나라 잃은 한을 씹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박지사는 1940년까지 심양에서 봉천 중학(당시 명칭)을 졸업하고 봉천소학교(당시 명칭)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 4월 민족 독립운동에 투신코자 중국 서안으로 밀행하여 독립운동 무장단체인 전지공작대에 입대 중 3개월 간의 한국청년 훈련반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새로 창설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박지사는 영국군에 선발 파견된 광복군 동지 9명과 함께 1943년 6월 한영 협정에 따라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선에 출정 영국군과 함께 인도 버마 전선에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년간 활동하였다. 박지사는 해방 후 1946년에 귀국 이듬해에 이애선 여사와 결혼 장남 종욱을 출산 슬하에 두고 다음해인 1948년 7월 해방 조국의 근간이 되고자 육군 사관학교 7기 특대생으로 입대 국군장교로 국방 임무에 당하던 중 6.25 사변 발발로 육군대위로 전사 여기 안장하였으며 서기 2002년 4월 6일 추모비를 세우다. 박지사는 항일 무장투쟁에서 뿐만 아니라 조국 수호의 국권으로서 젊은 일생을 받친 우리 역사에 빛을 발하는 위대한 애국지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