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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배속되어 보병대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눈물 겨운 군인생활을 하셨는데 중국 중경에 한국 독립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활동한다는 정보로 독립군이 되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규합한 동지 7명이 함께 탈출을 기도했으나 몇 번 실패하고, 1944년 12월경 중국 호남성으로 병력 대이동에 야간 행군을 틈타서 동기 배선두 오연근 신인식 지사와 함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엄한 경계를 피하여 일본군 대열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군 부대를 전전하며 대일 전투에 참가하였다. 호남성 상담에서 중경까지 수천리 먼 대륙길을 적과 싸우면서 구사일생으로 가는데 중국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임시정부에 와서 감격하며 우셨다. 우선 토교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로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김구 선생이 영도하는 한국독립당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경호를 맡았으며, 교민의 생명 재산보호 및 기간 요원 양성을 위한 일과, 특히 장기간의 고된 군사 훈련을 받고 폭격기로 한국 내의 일본 군사시설을 폭파할 실행이 임박하였는데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으로 이 실전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익년 1946년 7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이범석 장군이 인솔하는 귀국준비를 도우며, 비행기 편괴 배편으로 함께 귀국하셨다. 광복 후 혼란기와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시면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시다가 1954년 대구로 이주하셨고, 항상 조국의 장래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안빈낙도 하셨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생존지사로서 금오대상도 수여되었다. 지사님은 평소 건강하셨으나 갑작스런 충격으로 2003년 12월 5일 향년 80세로 대구시 서구 비산6동 자택에서 영면하시니 광복회에서는 동지장으로 대구 선열공원에 모셨다. 부인 김해 김소두 여사는 부덕이 있으며 슬하에 영자 영애 영숙 3녀를 두셨고 장녀는 안동 권삼진에게 차녀는 밀양 손선근에게 3녀는 밀양 박봉래에게 출가하였고 외손에 손정우 박창현 박철현이 있고 동생은 전우 후우 춘우이다. 지사님의 공훈을 기리고 추모하는 묘비 세우면서 삼가 비명 한 장 지어서 여기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