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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金明奎) 1893.6.3.~1977.2.10. 애국장(1990) / 밀양시 삼문동 389 이곳은 야은(野隱) 김명규 선생의 생가 터이다. 선생은 1912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인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전(全)학생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던 중 피체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1920년 12월 28일 서울에서 황상규의 밀명을 받고 길림무관학교(吉林武官學校) 설립기금의 조달을 위하여 신의주(新義州)에서 파견된 김노봉(金魯鳳)과 함께 창녕(昌寧)의 부호 하경석(河慶錫)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3천 원을 요구하여 150원을 모금한 뒤 서울의 황상규에게 전달 도중 피체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공갈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에는 창녕(昌寧) 유림지서(儒林支署) 갑비(甲斐)부장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오랜기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동년 12월 19일 창립된 신간회 밀양지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에 결성되었지만 제대로 된 행사를 열지 못하던 경남지방의 '경남기자대회'를 1930년 4월 3일,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행사성 사업으로 개최하여 새롭게 창립할 당시 6명의 이사를 선임하였는데, 그 이사 중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명단에 올라와 있어 그 이사 중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명단에 올라와 있어 그 즈음 밀양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행적은 특별히 밝혀진 것이 없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