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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형은 서울 사람이다. 1919년 2월 광성학교(光成學校) 2학년 재학시 3·1독립운동계획이 알려지자, 동교 기숙사 지하실에서 김재호(金載浩) 등 10여명의 상급생과 함께 대소(大小) 태극기 5,000여 매를 제작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여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제 평양(平壤)경찰서에 붙잡혔으나 미성년자(당시 16세)로 7일 후에 출감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2학년때 미국인 핫취 교수의 "한국의 여건상 기술·자본·원료 및 시장확보 등이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은 부당하다"는 친일발언에 대하여 이창희(李昌熙) 등 5∼6명의 학생들이 합세하여 구타하므로써 퇴학을 당할 뻔 하였으나 조병옥(趙炳玉) 교수의 옹호발언으로 1년간 정학(停學)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9년 도미(渡美)한 후 신학(神學)을 전공하면서 재미유학생회(在美留學生會) 조직에 참여하여 외교부장으로 피선되어 독립정신 고취와 임시정부(臨時政府)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5년 11월 미국 뜨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후 평양에서 목회(牧會)를 통한 독립정신 보급과 농촌운동에 주력하였다. 1937년 10월 평양지방 감리교(監理敎) 기독청년연합회(基督靑年聯合會) 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안창호(安昌浩)의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붙잡혀 소위 유언비어 유포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출감하였다. 그러나 다시 흥사단(興士團) 사건으로 붙잡혀 투옥되었으며 연이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운동으로 붙잡혀 기소유예를 받고 출옥하였다. 또한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제에 저항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구금당하였다. 1942년 1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안흥국(安興國)·한익수(韓益洙)와 함께 태평양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등 국제정세를 논의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3년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여 1943년 1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1944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중 2년 3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