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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독립운동가의 민족혼을 기리며 여기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덕절마을은 하동정씨 문절공후 유수공 청주파문중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과 정양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정순만(鄭淳萬,1873~1911)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추서. 당대에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던 인물로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물론 망명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한 선구자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를 이끌고 보안회 활동을 주도하며 일제에 맞섰고, 1905년 을사늑약에 분연히 얼어나 반대투쟁을 주도하였다. 고향에서는 문중과 힘을 모아 덕신학교를 세워 청주지역의 근대교육을 선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끼자, 이상설, 이동녕 등 동지와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불디보스토크로 옮긴 후에는 헤이그 특사파견 지원,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창간과 주필 활동, 동의회 참여와 안중근 의거 계획 등 망국을 전후한 시기까지 민족운도사의 중요한 순간에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1911년 연해주 한인사회 분파와 파쟁의 희생양으로 38년의 짧은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쳤으나, 연해주 한인사회의 반성과 단합을 촉구하여 권업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작지않다. 그의 아들 정양필(鄭良弼, 1893~1974)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05년 박용만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고학으로 커니 군사고등학교(Kerney Military Academy)를 졸업하고, 191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른바 한성정부의 평정관에 선임되어 일찍이 독립운동계에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후 미국에 계속 거주하며 유일한과 동업으로 회사를 경영하였고, 1930년대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였다. 1942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