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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비광장 우측 앞쪽에 건립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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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헌은 평안북도 희천(熙川) 사람이다.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교 대표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금되었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동지 안재홍 연병호 송세호 이병철 등과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민족운동에 첫발을 디딘 후 대동단(大同團)의 비밀단원이 되어 이 강(李堈)공(公)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 모셔 가려다가 발각되자 1920년 1월 상해로 탈출하여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도와 동단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기관지 "독립"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앙양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노무용(盧武用) 김재희(金載熙) 등 7인과 같이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철(鐵)과 혈(血)로써 왜적을 배제(排除)해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김 구(金九) 손정도(孫貞道)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다가, 1920년 10월 28일 동회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동년 11월 2일에는 동회(同會)의 교육부원(敎育部員)으로 노병회 설립취지를 살려 나갔다. 임시정부의 외곽지원단체인 노병회는 임시정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져 나가는데 기여하였다. 이어 1924년 6월 15일에는 임노공부원(任勞工部員)으로 노병(勞兵)을 초모하고 훈련시키는데 앞장선 바 있다. 한편 그는 1924년 1월 12일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 취임하여 노병회를 이끌어 가면서 상해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임시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에는 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김 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도와 민주공화제 정착과 그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또한 독립운동선상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국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기 위한 심판위원장이 되어 그해 3월 13일 드디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결국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정의 경무국장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병인의용대장을 역임하면서 상해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두 동생과 같이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두 동생은 체포되고 그는 항주(杭州)로 피신하였다. 그후 사천성만현(四川省萬縣) 성내에서 만현의원을 개설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흥사단(興士團) 원동대회에 참가하여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제6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동년 7월에는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 병인의용대를 부흥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6월 그가 경영하던 만현병원(萬縣病院)에서 신병으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