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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白初月)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 전남 천은사(泉隱寺)의 주지인 하룡하(河龍河)로부터 군자금으로 200원을 받고 동년 10월 7일에 다시 300원을 모금하여 만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독립군(獨立軍)에 11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6명을 각각 선발하여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군자금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시위계획을 세워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붙잡혔으며, 일본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반미친 상태의 폐인이 되어 서울 마포(麻浦)의 어느 포교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후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혀 1920년 3월 9일 서울로 이송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4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주(淸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