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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으로 당겨보았지만 성씨부터 다른 사람의 묘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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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문은 1919년 4월 전북 익산군(益山郡) 이리(裡里) 시장과 용안면(龍安面) 화배리(花盃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리시장 만세시위는 기독교계 인사 문용기(文鏞祺)ㆍ박도현(朴道賢)ㆍ장경춘(張京春)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 유학 중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박수문은 김종현(金宗鉉)ㆍ김철환(金鐵煥)ㆍ이시웅(李時雄), 그리고 서울 의전(醫專) 학생 김병수(金炳洙)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4일 정오 무렵 박수문은 이들과 함께 이리시장에 모인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만세를 부르며 따라 나서는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 고용원까지 동원하여 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문용기 외 5명이 순국하였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박수문은 4월 8일에도 길귀동(吉貴童) 등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일으키다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5일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