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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남 선생은, 1919년 4월 5일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의 홍범섭(洪汎燮)과 임의재(任毅宰) 등은 정산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오후 3시 이들의 주도 아래 서정리(西亭里) 정산 장터에서 모인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장터 일대를 행진하였다. 일제 헌병의 탄압으로 30여 명이 체포되자 약 700여 명의 군중은 정산헌병주재소(定山憲兵駐在所)에 몰려가 체포자 석방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4월 6일 전날 헌병의 발포로 사망한 권흥규(權興圭)의 시신이 정산헌병주재소에서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운구되었다. 오후 5시경 장례식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힘을 다해 부르짖었다. 한편 정산면 광생리(光生里) 등 3개 마을에서는 약 5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산의 만세운동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4월 7일 오후 1시경 50여 명의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밤 9시경에는 와촌리(瓦村里) 등 3개 마을에서 산상 만세운동이 있었다. 변수남은 4월 5일부터 4월 7일까지의 정산면과 목면 일대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8일 청양헌병분견소(靑陽憲兵分遣所)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笞) 70도(度)를 즉결처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