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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如大), 서울의 이갑성(李甲成), 감리교에서는 평양의 신홍식 (申洪植),서울의 박희도(朴熙道), 이필주(李剛柱)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핸英), 검창준(金昌俊), 원산의 정춘수(鄭春洙), 해주의 최성모(崔및빨) , 기독교신보사의 박동완(朴束完) 둥 대표 16인 으로 선정되었다. 불교에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감이 한용운(歸龍 雲)과 백용성(白龍城) 2명이 선정되었다. 그 밖에도 운동의 준비 과정에 참여했던 인물 중에서 자금을 담당했던 천도교의 박인호 (朴仁浩), 노헌용(1끓많容), 천도교와의 연대과정에서 이승훈과 더 불아 기독교계의 대표로서 활약했던 함태영(따台永), 수원의 김 세환(~ 떠뺏) 둥은 후속적인 일을 위해 민족대표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인물까지 포함하여 민족대표 48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2 독립선언서준비 2월 초순 최린이 최남선, 현상윤 둥과 운동계획을 협의할 떼 운동의 취지를 선언문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제기되 었다. 이 떼 육당 최남선은 자신이 그 기초를 맡겠다고 나섰다. 육 당은 이 일을 맡아 낮에는 연락사무를 하고, 밤에 아무도 없는 떼 를 타서 3-4일에 한 편씩 2월 22-23일까지 이 일을 완성했다. 육당은 민족대표들에 의한 선언서(宣등합), 일본정부, 귀족원, 중 의원 양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독립통고서(꽤立週쁨좌), 미 ;1111부 총섣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