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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표를 보냈다는 것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소문에 천도교 동 각계의 인사들도 자극을 받케 되 었다. @1919년 l월 하순 경, 손병희 풍 천도교 인사들이 조선독립선 언 및 청원서 제출올 계획합. 지l획의 실행은 최린이 담당하기 로결정하다. 밍 1919년 2월 상순 밤,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퉁이 회동 합. 이삼일후최린퉁 4명은박영효(朴泳孝) . 윤용구(尹껴求), 한규설(韓圭핍) , 김윤식(金允植) 등 구 한국시대 요직에 있었 던 이름 있는 자 및 기독교 관계자와 손병희 이하 천도교도 중 중요한 지를 조선 민족 대표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박영효(朴 泳孝) 풍은 이 제안올 거절한마. @천도교측 인사인 최남선이 기독교측 이인형(이송훈)에게 교 섭을 시도함. 그러나 %택의 의사소통 부재로 인해 기독교 단 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의 제출하려고 합. 그리고 2월 23일 유랩에 서면을 발송할 경우의 편의를 위해 현순을 상해로파견한다. @2월 22일경, 천도교측이 기독교측에 3천원의 자금올 대여하다. (Ï) 2월 24일경,논란끝에 청원서 제출과독립선언올 병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기독교 측의 오기선은 끝내 탈퇴함. 이떼 불교 계의참석도결정하다. @2원 26일경,최남선이 선언서의 초안올기초함. 그러고 2월 27 제 l부 총설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