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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해 주도록 크레인 특사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같은문서 2통 을 파리 평화회의 중국 대표단 고운으로 파리로 떠나는 상해 「밀 라드 라뷰(1\11피nrcl Ik , .iew)J 잡지 사장 토마스 밀라드(끼10mas Millard)에게 전달올 부탁하였다. 또한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대 표 겸 한국대표로 선정 , 1919년 2월 l일 파리로 출발시켰다. 신한청년당은 파리 평화회의를 통하여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의 당위성올 알리는 한편, 한국민족 전체의 의사를 표명하도록 촉구하기 위하여 선우혁과 김철을 1차로 국내에 파진하고, 이어 서 시병호 ·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 백남규를 제2차로 파건하 였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 평안북도 선천에 도착하여 양전백 목 사와 정주의 이숭훈, 길선주 목사 퉁올 만니- 독립운동을 일으키 는 것에 적극적인 찬동을 받고 상해로 돌아갔다. 평안도 지역 기 독교 시도지들은 당초 기독교 교회와 학생들이 연합하여 독램만 새시위를계획하였다. 김철은 서울에 와서 천도교측과 접촉하여 3만 엔의 송금을 약 속받고 상해로 돌아갔다. 서병호와 김순애는 대구지방의 애국인 사와 접촉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제l차로 조용은(조소앙)을! 제2차로 장덕수와 이광수를 파견하여 일본의 한국유학생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장덕수는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올 접촉하여 김규식의 파리 평화회의 한국대표 파친사실올 전하며 독립운동을 권유하 ').2 양4깅5.1운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