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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 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농민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 인 동기에서 일어난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펀,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 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디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결국, 동학 농민 혁명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 올 위한 처절한 몸부립A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충의 반일애국주의가 곧이어 발생된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 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성과를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둥이 있 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 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개남 퉁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둥 일부는 흥선대원군 둥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 을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또한 동학 농민 혁명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올 끌어들여 일제침 략을 앞당켰다는 일부 비판도 있지만,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 세를 간과(듀폐)한 주장이다. 동학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의 지I1부 홍성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