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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수는 I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양주에 집결하기 전의 중간 주둔지는 양동변으로 그 해 10월하순부터 11월 초까지 3,000여 명의 의병이 양동면의 삼산리 동 여러 마을에 주둔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 토별대는 산포대끼지 동원하여 의병올 공격, 삼산리 동에서 11월 7, H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 다. 이를‘삼산리전투’라하며 口l 리 대웅책올 새워 항전한 의병의 피해는 미미하여 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을 사전에 봉쇄하려딘 일 본군의 작전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지휘편제는 창의대장 이인 영. 군사장 허위, 중군대장 이은찬,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교남의 맹대장 박정신, 황헤진동대장 권중희, 관서진동대장 방인관, 관 북의탱대장 정봉준,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둥으로 조직되었다. ]3도창의군의 서울진격전은 쇠약해가는 의 병의 사기를 고양시켰으떠, 의병항쟁을 국제법상 전쟁의 단계로 발전시킨 점과 한국인의 계획적이고 대담한 무장투쟁올 널리 알 렀다는점에서 의미를갖는다. 그 뒤 의병들은각기 지역으로내 리가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양평에서는 김춘수 · 이연년 · 최대현 · 조인환 · 권득수 의병 장들이 용분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켜 여주, 이천‘ 팡주, 홍 찬 가평 둥지에서 일본군과의 항쟁을 치열히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은 불론이고 일반인에 대해사도 무차별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민가 수백 호를 불태우고 천년고찰인 용운사와 상원 사,사나사를의맹의은신처라하여소각하눈만행올저질렀다. I() 양굉3.1운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