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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로 무장시키고 ‘척왜국모보수지기(Jf:俊I행1 m-報뺨之hl0’라는 깃발올 만들어 군율을 정하고 훈련시켰다. 그는 의병올 중모하여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남한산성으로 이동, 경기도 전역에 서 10,000여명의 의병올 모았으나 서울진격을 실행하기 전 왜척 과 한패가 된 친한 친구의 간계에 빠져 체포되어 1896년 2월 14 일 남한산성에서 참수 순국하고 말았다. 그보다 앞서 지평에서는 안종웅, 이춘영, 안숭우, 김백선 동에 의하여 지평의병(빠平義兵)이 일어났다. 지평에서 의병이 일어 날 수 있었던 것은 화서 이항로의 도학과 의리를 강론하고 그가 위정척사를 외치고 애군우국을 역설하여 화서정신으로 무장된 화서학파가 있었기에 창의호국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1866년 의 병인척사상소는 7월 전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과 9월 화서 이 항로의 상소가 선두를 이루고 있다. 그 해 화서의 제자 양헌수는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함태를 격퇴하여 위정척시를 최초 로 실천하였다고 팽가한다. 1871년 신미양요가 세상올 불안하게 했고 1876년 강화도조 약올 반대하는 연암 최익현도 상소를 올렸다. 1881년 화서학파 의 홍재학 둥의 신사척사상소 이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 발령에 항거하며 올미의병은 사방애서 봉기하기에 이른다. 이 해 윤5월에 제천 장담에서는 류인석의 시우운인 퉁이 500여명 모여 강회를 했는데, 여기서 류인석은 시국에 처신하는 세 가지 의 리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거의소청 ! 둘째는 거지수구, 셋째는 지11부 -충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