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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사후처리를 담당했던 엔도오의 머릿속에는 3.1운 홍 발발 3개월 만에 전국의 참가인원수 202만 3,009명, 사망지수 7,5('1)명, 부상자 l만 5,%1명, 겸거자 4만 6,948명, 소각당한 교회 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나 되었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 했던 것이다 이 같은 혼란이 재 연된다면 재조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이 결코 보호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그로 하여금 치안권 이 양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딘 것이고, 그 대상자로 민 중 지도력올 갖고 있던 여운형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었다. 해내외를 막론하고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공식적으로 처음 거챙한 사람도 여운형이었다. 상해교민단장이었던 그는 국기 게 양대에 태극기를 높이 올린 중국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상해 동 포 7백 병과 함께 올드랭사인 곡의 애국가릎 부른 뒤 이렇게 연 설했다. “우리 민족이 노예가 된지 어언 10년‘앞서 감옥애 갇혀 목숨을 바친 많은 지사들과 2천만 동포가 독립을 산언한지 이미 l주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를 떠난 이래 7년 동안, 미국의 독립기념 일인 7월 /1일, 중국의 쌍심절인 10월 10일 퉁 남의 나라 경축식에 참석할 때바다 얼마나 눈물을 흘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 ]0년 동안보지 봇했던국기를다시 게양하고.10년동안 입 애 올리지 붓했던 애국가를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저 게양대애 높이 올린 저 태극기룹 디-시 접어 도로 장롱 속에 처박아둘 것입니까? 한번 높이 게양한 깃발 3.1() 양굉.~. )훈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