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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제는 해방후 형성된 냉전시대의 면협하고 자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숙하고 객관적인 관찰 에 따라 당시 3.1운동올 촉발시킨 당사자가 파리강화회의에 조 선대표를 따견하고 그 사실올 국내와 일본과 만주 · 연해주에 알 려 궐기를 촉구한 여운형이었다는 점올 사실대로 밝힐 떼가 되었 다. 이미 3.]운동이 발발한 그해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통지 였던 장덕수를 체포함으호써 3. ]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여운형이 었다는 사실올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는 하라 일본 수상이 허다한조선의 원로지도자들을제치고당년 34세의 청년 운동가 여운형을 통경으로 초빙한 사실로 입증된다. 또 3.1운동 이 발발한 직후 많은독립운동가들이 종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 던 만주나 연해주로 가지 않고 상해로 몰려간 것은 그들이 당시 여운형의 활동내용과 그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눈 돗 이다. 그틀과 그들의 수발을 든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났올 때 제2대 정무총갑 야마가타 이사부로(山 縣伊i郞) 밑에서 사후처 리를 담당했던 비서관은 엔도오 류우사 쿠(遠廳쩨11作)였다. 그는 3. 1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여운형이었던 것올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 후인 1945 년 8월 15일, 제9대 총독부의 정무총감인 그가 3. 1운동의 막후 연 출자였던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했다. 왜 그는 여운형에게 치 안권을 이양했던 것일까? 제좌부몽양여운형 선생과3.1운동 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