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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어)고 격찬히는 가운데 각 신문과 잡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으며, 문인 · 학자 · 사상가들의 간담올 서늘케 히는 일대반향을 불러일으컸다. 일본 의회는 하라 수상 이하 관계 장관들을 소환하여 이 문제 를 격렬히 추궁했다. 당시 일본 의회는 여운형 규탄장으로 바뀌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족원 의원 디까하시 사쿠에(高 橋作衛)를 비롯한 5명의 대의원이 14회에 걸쳐 대정부 질문올 벌 였고, 하라 수상올 비롯한 7명의 대신이 답변을 하기 위해 12회 에 걸쳐 의정단상에 나가야 했다. 세키와 사토루(關和知) 의원은 4회, 사키-모토 산노스케(版本彩之助) 의원은 6회나 질문했고, 하 라수상도 5회에 걸쳐 답변에나설 정도였다. 당시 〈제국의회의시록〉은 자기들 정부가 회유해보기 위해 초 빙한 식민지의 한 청년 곧 ‘돼먹지 않은 조선인(不造願A)’이 자 기들 나라 한복판에 들어와 펼쳐 보인 것이 다름 아닌 항쟁예술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 의원들의 정부질타로 가득 차 있다. “탄주지어를 그패로 놓아준 이유가 무엇인가?" 빗발치는 여론을둥에 업고하라내각올붕괴시키는데 일본 의원들이 사용 한 탄주지아(팝빠之魚)란 일본의 고깃배를 삼칸 물고기 곧 여운 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당초 동경행을 반대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많았지만, 그의 방일이야말로 독립운동사 전체 가운데서도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부각사킨 획기적 개가의 하나였으며, 싱헤 임시정부가세워지고나서 거둔첫대외성과물이기도했다 저13부 용양 여운형 선생과 3.1운동 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