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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행을 굳히자 여운형은 전남 하의도에 유배중인 장덕수를 통역으로 해야겠으니 그를 석방해주는 조건이라면 가는 것을 숭 낙하겠다고 일본 영사관에 통고했다.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같 이 거사했던 장덕수에 대한 우정과 의 리를 지컸던 것이다. 좋다 는 답이 오자 여운형은 임시정부가 일종의 감시 역으로 붙인 최근 우와 승려 신상완(申尙玩)올 대통하고 그해 11월 14일 아침 상해 부두애서 일본으로 떠나는 우편선 가스가마루에 몸을 실었다. 11. 적의 심장부에서 외친 조선독립 동경에도착한여운형은고가척식국장관과 6회,다나카육군 장관과 2회, 미즈노 정무총감과 1회, 노다 체신 장관과 l회 띤담 했다. 일본 고위관리들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조선의 자치운동올 여운형에게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다른 회사 와 합병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듯 일한합병 또한 그런 것이 아 니었겠느냐는 고가의 논리에 대해 “하펼왈리(何必티利)잇고 역 유인의이이의(亦有仁義而E쫓)리이다(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는 가, 또한 인의가 있을 뿐이다)" 핑)리는 〈맹자〉의 일절을 인용하 면서 “회사는 모리를 위해 생립한 것이지만 ..... 국가는 사회의 실 체요 역사의 장성(長成)이며 도덕의 존재요 사법의 실체이니 개 저13부몽양 여운형 선생과 3.1운동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