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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는 경성역 앞의 세브란스병원에 머물다가 2월 25일경 부모 의 병문안을 위해 본적지로 향했고 통정을 살펴다가 3월 7일 고 향올출발했다.써)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2월 중순경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부산에서 백신영(白 信永),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합태 영(威台永)을 만나 조선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는 소식 을 전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합태영으 로부터 이미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퉁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내 에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올 전해 듣 고 그녀도 3 . 1운동에 동참하고 싶어 했으나, 함패영이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낌규식의 사기에 영향올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 여 평양을 거쳐서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만주로 망명했다.써 장덕수는 2월 17일 동경올 떠나 2월 20일 경성에 돌아온 뒤 “이 상재를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와 청년 동지들올 만나서 상해와 동경의 사정올 전해주" ,0) 었는데, 신한청년당의 핵심 당원이었 던 그의 말윤 지도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이후 뒤쫓 는 형사들을 피해 인천에 잠복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들 신한청년당 당원들과는 별도로 동경 YMCA회관에 참석 하여 2.8독립선언서의 발표 현장을 지켜본 여운홍은 2월 14일 우에노공원에서 만난 장덕수로부터 형의 편지를 전달받고, 거 기에 지시된 대로 귀국후 이상재 · 최남선(챈南휩) . 함태영 . 제3부농양여훈형 신생과3.1운동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