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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919년 1월 31일 고베항에서 탄 고쿠라마루(小깜)L)의 행 선지는 여운형의 활동지인 상해였고, 상해에 도착해서는 신한청 년당 당원들인 김철 · 한송계 · 한진교 동올 만났을 뿐 아니라 한 진교의 하숙집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있올것이다.서l 7. 3.1운동을 촉발시킨 신한청년당 당원들 최팔용과실행위원 10명은 2.8행사직전에 이 사실을알리기 위 해 송계백파 최근우를 국내로 띨파했다. 그들은 완성된 선언운 초 안올 국내로 반입하여 필사한 뒤 중앙학교의 교감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宋鎭禹) 둥에게 전달했다. 보성학교 출신의 현상윤은 이 를 보성학교 교장 최 린(崔밟)에게 전달했고, 천도교 신자인 최 련 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에게 이를 전달했다. 동경유학생 들이 2.8독렴선언올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손병희는 “외국에서 젊 은사람들이 그처럼 활약하고 있다면 우리도호웅해야지’· 씨)하고 적극적인 반용을 보였다. 이처럼 송계백과 최근우가 전한 2.8독립 선언문과운동소식이 국내에 영향을끼친 것은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3. 1운동의 불을 당긴 전부는 아니었다. 조선 대표의 파리 파견을 전국적으로 얄리고 민중궐기를 촉구한 보다 조직적인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제3부꽁양여운형 신생파 3.1운동 31';